등록날짜 [ 2012-11-13 13:24:29 ]
가치관이나 신념은 한번 굳어지면 바꾸기 힘들어
냉정한 판단으로 성숙한 시민 사회를 만들어가야
보통 우리는 지식이 많거나 경험이 풍부할수록 세상을 보는 안목도 넓고 남들보다 더 현명할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처럼 정보가 자산이 되는 지식사회에서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다루고 양질의 정보를 많이 접할수록 판단이 한결 정확하고 성숙할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물론 어린아이보다는 어른이 더 냉정하고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행동하기에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더 원숙해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최근 많은 인지과학, 사회학, 심리학 연구를 따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고 판단할 때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관이나 신념에 더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가 매우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도덕적 실수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그를 감싸주려 한다. 반면에 자신이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어떤 올바르고 선한 행동을 하거나 그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돼도 믿으려 하지 않거나 애써 무시한다. 특히 지금처럼 큰 선거를 앞두고 있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이런 편향성은 더 크게 작용한다.
이런 현상을 학자들은 다양한 이론으로 설명하지만, 이미 고정된 자아 중심성이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확립한 특정한 인지 도식과 감정이 판단에 작용하면 내게 맞는 사실은 긍정하고 내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외면하는 현상이 생긴다. 어떤 사실이 객관적으로 드러나도 그것이 내가 지닌 신념이나 가치관에 맞지 않으면 나중에는 사실 자체를 왜곡해서 믿는 경향까지 생긴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이런 행동 메커니즘을 통해 사이비 종교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시한부 종말론이 거짓으로 판명 나도 사교 집단을 떠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신봉한 신념을 부정하면 자기 자신의 존재가 붕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신념은 사태가 꼬일수록 더 완고해지는 경향이 있다. 도박판에서 돈을 대거 잃고도 대박을 꿈꾸는 것이 전형이다.
이런 자아 중심성은 많이 배운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식인들이 특정한 기준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이슈를 선별하는 방식을 ‘안경의 은유’를 통해 설명하기도 했다. 지식인들은 대중보다 더 객관적으로 사태를 판단할 것 같지만, 이미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에 맞춰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특정한 편파성이 생긴다.
빨간 안경을 쓰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파란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지닌 인지 도식은 우리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보수’와 ‘진보’는 아마 우리 사회 집단을 가장 크게 나누는 안경이지만, 각자는 저마다 지닌 색안경으로 세상을 보면서 자신이 내린 판단이 가장 옳고 남들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진실이 있기 마련이고 세상이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움직이지도 않는다.
애초부터 잘못된 안경을 쓰고 있다면, 우리가 아주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면서도 그것을 전혀 모를 수도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경향이 시간이 가면 더 굳어져 나중에는 안경을 바꿔 끼기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끔찍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라는 하나님 명령에 맞서 완고한 고집을 부리다 나중에는 자식과 그의 군대 전체를 잃은 바로 왕 이야기는 이런 어리석음의 전형적 예다.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행28:26)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는지 한번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31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