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단풍과 낙엽 그리고 십자가

등록날짜 [ 2012-11-20 13:34:02 ]

나무가 잎을 떨구고 자신을 비워 겨울을 맞듯
인생의 고난 속에서 붙들 소망은 오직 예수뿐

나무만큼 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무언(無言)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것도 없다. 특히 곱게 물든 단풍과 무심히 뒹구는 낙엽은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사색을 경험하게 하니 가을은 나무의 계절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 가을은 나무가 고통받는 때라고 한다. 도시를 버리고 숲에 들어가 자연과 함께 사는 숲 해설가 김용규 씨가 저서 『숲에서 온 편지』에서 말하는 나무의 겨울나기는 참으로 눈물겹다.

나무는 자기들에게 무한히 성장할 시기만 있지 않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늦가을은 나무에게 모든 성장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시기다. 봄을 맞이하려면 겨울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겨울 준비는 모든 것을 비워 간결해지는 데서 시작한다. 먼저 성장하려고 잎과 줄기와 가지로 보내던 물을 땅으로 돌려놓는 작업을 한다. 이때 남은 영양분도 회수하는데 이 현상이 ‘단풍(丹楓)’이다. 가을을 상징하는 화려한 단풍잔치는 나무의 영양분이 빠져나가며 만들어내는, 달리 말해서 나무들이 자신의 욕망을 거둬들인 간결함의 결과물인 셈이다.

나무의 자기 비우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찬바람이 불면 나무는 지니고 있던 잎마저 땅으로 아낌없이 떨어뜨린다. 그 이유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을 문풍지로 틀어막듯, 잎을 달고 있던 그 자리로 차가운 기운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니 참으로 처절하다.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나무는 봄날부터 가꿔 온 모든 잎을 완전히 버리는 벌거벗는 의식을 치르는 셈이다.
 
나무가 이처럼 생산하려는 모든 시도를 멈추고 최대한 자기를 간결하게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간직한 씨 속의 생명을 혹독한 겨울 동안 지켜내 봄에 싹을 틔우기 위해서다. 지킨다기보다는 버티는 것이다. 나무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을 이렇게 벌거벗은 모습으로 깊은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나무의 삶과 우리 인생을 비교한 저자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우리 삶에도 종종 겨울이라는 시간이 찾아들죠.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겨울이 찾아온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겨울을 맞았는데도 자신의 삶에 꽃이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고통이 거기에 있어요. 겨울을 맞아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고, 겨울이 온 것을 알지 못한 채 지나온 봄날처럼 여전히 꽃피기를 바라는 데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나무가 겨울을 침묵으로 버텨내듯 우리 인생에서도 모든 것을 멈추고 오직 희망 한 가지만 끝까지 붙잡으려면 모든 것을 비워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고난에 처한 이에게 적절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맞이해야 할 죽음의 때, 다시 맞이할 봄이라고는 없는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냥 자연으로 돌아가면 끝인가? 그것으로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런 때가 오기 전에 누구든지 ‘십자가’라는 나무를 통해 예수를 만나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나무가 단풍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이파리를 떨어뜨려 철저히 자기를 비우듯 붉은 피를 흘리시고 인류를 사랑으로 덮으신 예수.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조롱과 저주를 당하시며 자신의 살과 피를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예수. 그 때문에 인간에게 닥친 참혹한 겨울인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해주신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만나야 한다.

예수로 주신 이 영원한 생명만이 겨울 같은 인생을 이길 희망이며, 이 생명의 씨를 간직한 자만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죽음 이후 펼쳐질 영원한 천국이라는 화려한 봄을 맞이할 수 있다. 단풍과 낙엽의 계절 가을, 알 수 없는 고독으로 괴로워하는 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 예수의 나무 십자가를 만나보라.

위 글은 교회신문 <31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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