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

등록날짜 [ 2013-02-13 10:27:35 ]

언제부턴가 물질적 부를 행복의 척도로 착각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정도의 차이와 구체적인 바람은 다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삶의 무게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니 자살은 행복에 대한 좌절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이 인간의 큰 관심사이기에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행복에 관해 얘기하며 행복에 도달하는 방법을 논해 왔다. 일례로 쾌락주의 학파는 인생의 목적을 행복으로 정의하여 쾌락이야말로 행복의 본질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금욕주의의 흐름을 계승한 스토아학파는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면서도 쾌락주의와 달리 어떤 정념이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정신적 경지를 이상으로 삼았다. 철학자들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은 행복한 삶을 이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예술이 발전하고 학문과 교육에 신경을 쓴 것도 행복을 중시하는 세속적 세계관 때문이었다.

오늘날 과학기술과 의학이 발달하고 산업이 고도화하여 인간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윤택해지고 평균 수명이 증가했지만, 행복은 거기에 비례해 증가한 것 같지 않다. 갈수록 증가하는 여러 정신질환과 자살률 그리고 범죄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지만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안정을 가져다 주지 못하며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받는 여러 스트레스의 증가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 붕괴와 전통적 가치관의 상실도 불행의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은 외적 조건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느끼는 만족이자 스스로 부여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물질만능주의 사고가 지배하여 인간은 과거처럼 삶의 의미나 바른 삶을 위한 지혜가 무엇인지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우위를 보여줄 물질적 부를 행복의 절대적 척도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물질적 부가 증가하면서 인간의 정신적 삶은 더 황폐화하였고 현대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불안감은 더 커졌다. 이런 경향은 변화와 유행이 유독 빠르고 물질적으로 서로 비교하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더 심하다.

몇 년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측정한 지표를 본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세계 178개국 중 102위로 아주 낮았다. 통계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부유한 나라들의 순위가 대체로 하위권이고, 상위권 나라 중에 가난한 나라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호주 부근 작은 섬나라인 바누아투였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에 크게 만족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복도가 높다고 한다. 또 바누아투 사람들은 태풍과 지진을 제외하면 두려워하는 것이 없으며 공동체적 가치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다.

이런 기사를 보면 행복은 우리가 느끼는 만족과 인정하는 의미에 많이 좌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여건과 사회의 안정을 전제하고 말이다. 같은 조건에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행복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안면 피드백’ 이론이 있는데, 안면 근육의 움직임이 우리 뇌에서 특정 정서를 활성화한다는 견해다. 인상을 찌푸리면 기분이 안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증가하지만, 웃는 표정을 자주 지으면 긍정적 정서가 생긴다는 것으로 웃음치료가 이 원리를 따르고 있다. 성경은 어떤 조건을 달지 않고 ‘항상 기뻐하라’‘범사에 감사하라’(살5:16,18)고 명령한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 석 집사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現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32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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