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3-11 09:28:55 ]
과격 행동의 원인은 대부분 폐쇄적 사고 때문
다양한 의견 수렴하는 사회 문화 정착 필요해
최근 중국 쿤밍 시에서 테러범이 흉기를 무차별 휘둘러 수십 명이 희생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 이집트 시나이반도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자살테러로 한국인이 탑승한 관광버스가 폭발했다. 세계를 뒤흔든 미국 9·11 테러부터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테러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이 테러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테러 상당수가 알 카에다, 헤즈볼라를 포함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과 이슬람권 과격 단체에 의해 발생한다.
과거에는 극우 정치세력이나 전제주의 독재권력 같은 극단화한 정치집단에서 과격 행동이 발생했다. 1930년대 나치 정권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 킬링필드라 불리는 1970년대 캄보디아 급진 공산 정권이 저지른 양민 대학살,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진 인종청소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사건이 극단주의로 말미암아 벌어졌다.
극단주의란, 이데올로기나 행동의 경향이 극단적으로 치우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면 극단화는 왜 발생하는가? 캐스 R. 선스타인(Cass R. Sunstein) 하버드대 교수는 사람들이 집단에 속하면 혼자 있을 때는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긴다고 말한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폐쇄적인 의견을 나누거나 다른 이들이 자기 생각에 동조하는 경우 극단적인 견해로 빠져드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소수의 믿음과 견해가 다수에게로 확산하는 ‘사회적 폭포 현상(social cascades)’은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자신이 실제로 아는 정보를 근거로 판단을 내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근거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다. 선스타인 교수는 극단화가 가속하면 온건하거나 다른 견해를 지닌 구성원은 밀려나고, 열성적이고 맹목적인 추종자들만 남는다고 경고한다. 이런 집단에서는 강한 연대감만을 최우선으로 하고, 구성원 간 옳음과 그름, 진실과 거짓, 분별과 몰상식을 구분하지 못한 채 폐쇄적이고 불온한 극단주의가 만개한다.
극단주의를 막을 방법은 무엇일까? 민주주의 시스템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생각해야 한다. 어느 집단이나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작동하면 극단화를 방지할 수 있다. 이는 판단을 그르치지 않고 부당한 정책으로 쏠리는 현상을 제어해 준다. 민주주의를 잘 실현하는 미국은, 극단화를 극도로 두려워해 건국 초기에 견제와 균형이라는 장치를 정치제도를 실현하는 근간으로 삼았다. 중앙정부 독재를 방지하고자 마련한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권한 배분 시스템이라든지, 하원 독주를 상원이 견제하는 양원제 같은 제도가 극단화를 차단하는 대표적인 예다.
미국 정치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의견 차이와 입법부에서 벌어지는 정당 간 충돌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게 촉진하며, 다수가 횡포를 부리지 않게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갈파했다.
정당정치에서 여당과 야당 간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상임위원회 법안 심사에서 의원들이 다양한 의견으로 치열하게 갑론을박하는 다소 혼란스러운 요소들은 오히려 집단극단화를 차단하는 효과를 내는 민주주의 메커니즘이다. 입법부와 대통령 간 관계에서도, 국회가 보낸 법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현직 대통령이 죄를 지을 때 국회가 탄핵 소추하는 정치제도 역시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어떤 조직체든 의견의 차이를 자유롭게 소통하는 사회에서는 극우나 극좌와 같은 극단주의가 꿈틀대지 않는다. 소통하는 세계를 이루려면 표현의 자유가 불가결한 요소다. 민주국가는 정보가 위아래로 자유롭게 흘러 여론을 형성한다. 반면, 일당독재 공산국가나 압제체제에서는 반대 의견이나 다양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아 극단화로 치달을 확률이 크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도 비슷한 속성이 있다. 이들 단체에 속한 자살 테러리스트는 수많은 인명을 죽인 살인자에 불과한데도, 대의를 이룬 성스러운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자살폭탄테러는 잔인한 폭력행위여서 절대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견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슬람 극단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문심명
국회사무처 재직
제29남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37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