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3-24 17:04:27 ]
영토 유린 상황 보며 핵무기에 집착할 가능성 높아
6자 회담을 통한 해결 기미, 갈수록 어두워질 전망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크림 공화국 전격 합병선언이 북핵 문제 해결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12월 소련 연방 붕괴와 함께 독립하여 세계 제3위 핵 보유국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미국, 영국, 프랑스로부터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을 약속받고 비핵화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독립 20여 년 만에 영토와 주권 보호를 약속했던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해 우크라이나 영토를 유린했다. 우크라이나가 핵을 계속 보유했더라면 러시아가 이럴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러시아가 이렇게는 못 했을 것이라는 교훈을 북한에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불똥이 북한 핵 문제로 튀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미국과 소련의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Ⅰ)에 따라 카자흐스탄, 벨로루시와 함께 전술핵무기를 러시아에 이관하기로 하고 1994년부터 이후 3년간 자국 내 핵탄두를 모두 러시아로 이전했다. 또 1994년 5월 NPT 회원국이 되었고 1995년에는 IAEA에 가입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긴장관계에 있었던 탓에 우크라이나 의회는 핵 폐기를 적극 반대했지만 크라프추크 대통령은 비핵화를 밀어 붙였다.
당시 우크라이나가 핵 보유를 고집했더라면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 악화,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등이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또 우크라이나의 핵무기와 기술은 자체 개발한 것이 아니어서 핵무기 관리에 기술적으로 취약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나 핵물질 유출 등 의도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 국제사회의 경제적 보상이 핵 폐기의 강력한 유인으로 작용했다. 구 소련 붕괴로 갑작스럽게 준비 없는 독립을 맞은 신생국 우크라이나는 당시 여러모로 핵 폐기가 유리했다.
북한 지도부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2011년 리비아 사태를 떠올려보면 북한의 반응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독재자 카다피가 국민의 민주화 바람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2011년 3월 나토가 리비아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자 북한은 이를 강력히 비난했다. 북한 외무성은 “미국이 떠들기 좋아하는 리비아 핵 포기 방식이란 안전담보와 관계개선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얼러 넘겨 무장해제를 이룬 다음 군사적으로 덮치는 침략방식”이라며 핵 무장을 정당화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동갑내기 독재자 카다피의 몰락을 보면서 핵에 대한 집착을 더욱 강화했다고 할 수 있다면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 역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을 핵 무력 증강에 더욱 매달리게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북한 국방위원회는 지난 14일 “미국의 핵 위협과 공갈이 계속되는 한 자위적 핵 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며 그 위력을 과시하려는 추가적인 조치들도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강대국들의 안전보장 약속을 믿고 자발적으로 핵을 폐기했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의해 영토주권이 위협을 받으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중대한 장애로 떠올랐다. 북핵 문제의 해결방식으로 거론돼 왔던 ‘리비아 방식’이 카다피의 몰락으로 설득력을 잃은 이후 이번에 ‘우크라이나 방식’마저 효용성을 상실해 가면서 6자 회담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려워지게 됐다. 오히려 안보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들이 영토와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결국 핵무기를 보유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핵 무장론이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더 커지고 있다.
/이웅수 집사
KBS 보도국 북한부 팀장
신문발행국 논설위원
위 글은 교회신문 <37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