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8-12 13:37:25 ]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는 가장 한국화된 도시
남북한 사정에 두루 밝아 관계 개선에 도움 될 듯
지난달 말 중국 연길과 북·중·러 접경지역,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취재하고 돌아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의 변화와 북한 관계, 북·중·러 접경지대의 경제협력 현황 등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흔히 간도로 불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50여 년 전 청나라 때 이주해 간 조선인들이 시초다. 가난과 굶주림을 면하려고 간도로 간 조선 이주민들은 황무지를 옥토로 개척했고, 강력한 봉금정책을 실시하던 청나라는 이주민들의 쌀농사 기술과 높은 교육열, 성실성 등을 고려해 정착을 허용했다.
이주민들 덕분에 지금도 중국에서 동북지역 쌀은 고품질로 유명하다고 한다. 조선 이주민들은 1930년대 이후 중·일 전쟁과 항일투쟁, 국·공 내전, 6.25 전쟁을 거치며 중국 공산당을 도와 피를 흘렸고 중국 정부는 그 대가로 60여 년 전 조선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것이 연변조선족자치주다.
연변 조선족 사회는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거의 유일하게 모국을 가진 소수민족 사회다. 연변 조선족 사회의 모국은 한반도였으나 분단 이후에는 한국과 단절되면서 사실상 북한이 모국이었다.
조선족 수만 명은 6.25 전쟁 때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고, 많은 수가 북한에 일가친척을 두고 있어 혈연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북한과 밀접하다. 이들에게 한국은 6.25 전쟁, 북한이 말하는 ‘인민해방전쟁’, 중국이 말하는 ‘항미원조전쟁’의 상대였다. 연변 조선족들은 북.중을 혈맹으로 이어 준 핵심 고리였고 북한과 벌인 교류를 통해 발전했다.
연변 조선 사회가 한국과 가까워진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다. 한국은 연변 조선족 사회에 기회의 땅이었다. 이때부터 조선족 사회에는 ‘코리안 드림’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수십만 명이 한국으로 와 돈을 벌어 부를 축적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 시는 중국에서 가장 한국화한 도시로, 한국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한국 문화를 거의 실시간으로 직수입한다고 조선족 가이드는 말했다.
반면, 한.중 수교 이후 그리고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북한과는 불편해졌다. 북한의 많은 가족, 친척이 연변의 가족 친척들을 찾아와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서운함과 갈등이 커졌다고 한다.
크게는 중국과 북한이 과거와 같은 혈맹이 아닌 보통 국가의 관계로 변화하면서 연변 조선족 사회와 북한의 관계도 근본적인 변화의 길을 걷고 있다. 특히 북한의 폐쇄성과 핵실험 등 도발로 북·중 관계가 악화하자 연변 조선족 사회도 북한과 벌이는 무역이나 교류에 제한을 받고 있다.
더구나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연길에서 만난 한 연변대 교수는 김정은 정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장성택 처형이 조선족 사회에 준 충격은 컸다고 했다. 김일성, 김정일 정권 시대에는 괜찮았지만 김정은 정권 시대 들어 북·중 관계가 악화하면서 북한 때문에 못 살겠다는 인식이 크게 확산했다고 한다.
중국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내 북·중·러 접경 도시인 훈춘을 변경도시들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적 차원에서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동해와 태평양으로 나가려는 중국의 열망이 담겨 있다. 한국도 2012년부터 포스코-현대가 합작해 물류단지를 짓고 있으며 다음 달이면 1단계 공사가 끝난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북한의 개혁개방과 나진항이 열린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열리지 않는 북한에 대해 갑갑함을 느끼는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다. 중국, 특히 연변 조선족 사회도 북한이 열릴 날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조선족들은 북한과 한국의 사정에 밝을 뿐 아니라 남북을 모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날로 강해지는 요즈음 조선족의 역할과 가치를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할 때인 듯하다.
이웅수 집사
KBS 보도국 북한부 팀장
신문발행국 논설위원
위 글은 교회신문 <39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