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9-03 01:45:03 ]
모든 분쟁은 권력을 독점하려는 탐욕에서 기인해
예수의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는 삶이 중시되어야
작년에 한국을 다녀간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저서 『사도바울』에서 초기 교회가 이상으로 삼은 보편주의 원리를 기독교 정신의 정수이자 인류에 대한 공헌으로 평가하면서 철학자 바울의 면모를 조명한 바 있다.
바디우에 따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라는 성경 구절은,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잘 보여 준다.
기독교는 배타적 선민의식을 강조한 유대교와 달리, 민족과 계급을 초월해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춰 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를 통해 선을 실현하는 성숙한 종교였다. 일찍이 로마가 대제국을 건설할 때 여러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관용정책을 베풀기는 했지만, 기독교는 더 나아가 생명 하나하나를 소중히 생각하여 개인들이 협력해 형제적 연대를 실현하는 공동체 문화를 창조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기 교회의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날마다 함께 모여 교제하고 기도하며 함께 음식을 나누며 개인의 재산과 소유까지도 필요에 따라 나눈 것이 바로 초대교회였다. 이런 모습과 행실이 아름다웠기에 날마다 믿는 이의 수가 늘어났고 사람들의 칭송도 자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고, 유럽을 넘어 세계 모든 민족에게 뻗어 나갈 수 있었던 힘은 이처럼 개인을 강조하면서 서로 협력하여 선을 만드는 아가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보편성은 개인을 억압하고 무조건 전체를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힘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지체 비유에서 보듯, 각자 자기 위치에서 능력과 개성을 발휘하면서 한 몸을 이루어 협력하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 문화다.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주창한 보편주의 논리는 한편으로 개인이나 차이만 절대시하는 상대주의 논리와도, 또 맹목적인 단결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사고와도 거리가 멀다. 아직 봉건주의도 확립되지 않은 그 옛날에 이처럼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강조한 기독교 사상은 시대를 앞서 간 윤리 의식을 잘 보여 준다.
<영혼의 때를 위하여> 400호를 맞아 기독교 보편주의 사상을 강조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사회갈등과 폭력의 억압을 해결하는 데 이것을 유용한 원리로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 인간은 많은 법과 제도를 만들고 엄청난 지식을 쌓았지만, 전 시대보다 더 극악한 범죄, 폭력, 전쟁과 잔인성이 빈번해지는 야만성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 학살,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며,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인종차별과 이에 항의하는 폭력적 소요가 자주 발생한다. 이 모든 분쟁은 사람을 도구처럼 다루어 소수의 기득권을 지키고 정치권력을 독점하려는 탐욕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도 이념 갈등, 세대갈등, 계급과 계층갈등으로 사회 전체가 반목과 대립이 심하며 정치권은 사회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에서 보듯 서로서로 도우며 어려움을 함께했던 공동체 문화는 소멸하였고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이기주의 행태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정치는 실종되고 사회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법원으로 문제를 가져가기 일쑤다. 갈등은 빈번하지만 이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해결하려고 한다.
이해타산에 기초한 승자독식 논리로는 절대 사회갈등을 풀 수 없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며 모두를 위한 대속의 은총을 강조하는 사랑만이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는 보편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 신문도 이런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도구가 되길 기도한다.
김 석 집사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40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