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2-02 23:01:24 ]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수도 아니고, 무기도 아니다. 사실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는 지휘관의 전략과 전투원의 사기다. ‘일당백’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도, 죽고자 덤비는 한 사람이, 살고자 하는 100명보다 낫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사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100명이 한꺼번에 덤비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나. 100명이 모두 죽을 각오로 덤비면 이길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만 누구 하나 나서려고 하지 않으면 그 100명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일 뿐이다. 한 명이 죽어 나가는 장면을 보고 자기도 죽을까 봐 겁먹고 도망가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고대 이수스 평원에서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 3만 5000명과 페르시아군 15만 명이 싸운 전투는 유명하다. 이때 새로운 전투의 유형이 나오는데 바로 기마병 활용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전투라고 하면 수많은 인원이 무리를 지어 긴 창을 들고 적군의 접근을 막으며 전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누가 먼저 전열을 흐트러뜨리느냐가 전투에서 중요한 관건이었다. 한 무리에 섞여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나온 이는 당연히 전투 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는 이 점을 간파하고 기마병을 이용해 무리의 양 옆과 배후를 쳐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이후 주력 부대를 빠르게 전진시켜 적의 지휘부를 섬멸했다. 추격전은 신속하게 하되 절대 필요 이상의 잔인함을 보이지 않았다. 겁만 주고 다시 나올 수 없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 능력을 그대로 본 뜬 이가 바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다. 한니발은 2만 5000명 보병과 당시에는 획기적인 코끼리를 이용하여 로마제국을 짓밟았는데, 이 전투 방법도 바로 무리를 흐트러뜨리고 그사이 기병을 투입해 다시 모일 수 없도록 만들고, 이후 보병을 투입하여 섬멸하는 방식이었다.
총 75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가진 로마군은 2만 5000명뿐인 한니발군을 간단히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기병대와 코끼리부대를 써서 로마의 중장보병을 뒤흔들어 놓고, 이를 다시 보병대로 밀어붙이는 전법으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특히 기원전 216년에 발발한 포위섬멸전의 대명사인 칸나에 전투에서는 로마군 8만 명 중 5만 명을 살육했다. 이는 1916년까지 서양에서 일어난 전투 중 한 번에 죽은 최대 인원이었다.
무리를 지어 있는 보병에 앞뒤 안 가리고 전진만 하는 코끼리를 투입하면 어쩔 수 없이 보병이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를 기병이 양 쪽에서 치고 나오면 당연히 전열을 갖출 수 없게 되고 이때 주력 부대를 내보내 적을 섬멸했다. 한니발은 이런 방식으로 로마와 벌인 전투에서 17년간 승리했다.
전투원이 무리에서 이탈하면 전투는 그대로 끝난다. 현대에서 전쟁은 이미 이런 보병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얼마나 더 뛰어난 최첨단 무기를 확보하느냐가 관건이기는 하지만, 약 30년 전만 하더라도 보병 간의 전투가 전쟁의 핵심이었다. 군사가 작전 범위에서 이탈하거나 낙오하면 그것은 이미 전투원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그렇다. 맹수가 영양이나 코뿔소와 같은 초식동물을 사냥할 때도 언제나 무리 가장자리에 있는 동물들을 공격해 그 속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겁을 주고 유도하면서 기회를 엿보지, 절대 무리 중앙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떨어져 나오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먹잇감으로 만든다.
신앙생활에서 모이는 자리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신앙생활은 영적 전투이고, 무리에서 이탈하면 그만큼 신앙인으로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왜 성경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 혼자 신앙생활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언제나 무리 가운데서 무리와 함께 움직이고 무리와 함께 나아갈 때 안전하다. 직분을 맡아 주님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그 가운데서 행할 때 비로소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정재형 편집장
위 글은 교회신문 <42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