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3-30 16:59:26 ]
오늘날엔 십자가가 교회를 상징하는 마스코트처럼 여겨진다. 그 모양도 다양하다. 어떤 이는 십자가를 몸에 소중하게 지니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 봐도 십자가는 당시 극악무도한 죄인을 벌하는 저주의 형틀이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는 말씀처럼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상징이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가 바로 이 저주의 나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은 그 몸으로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려는 것이다(벧전2:24). 십자가형을 받은 자는 죄목이 적힌 명패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짊어진 채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거리를 지나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예수에게도 처형 장소인 골고다까지 약 800m 길을 십자가를 지시게 했다. 저 사람은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자라고 모든 사람에게 각인하게 해 유대인의 기억 속에서 지우기 위해서였다.
처형 장소에 도착하면, 먼저 죄인의 옷을 벗긴다. 이어 십자가 나무에 등을 대고 눕혀 팔을 벌리게 한 후, 손에 못을 박고 세로 형틀에는 발을 못 박는다. 다음 십자가 끝부분을 땅에 대고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박아 세운다. 이 형벌을 받는 자는 오랫동안 피를 조금씩 흘리며 고통 가운데 죽는다. 아주 강인하고 원기왕성한 사람은 완전히 죽는 데 이삼 일이 걸리기도 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 시간으로 오전 9시에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여섯 시간 동안 육신에 가해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특히 낮 12시부터는 온 땅에 어둠이 임하더니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까지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이때 육신의 고통이 절정에 다다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께서 고통을 경감하셨겠지’라고 오해할 수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십자가에서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셨는지 예수께서는 이렇게 절규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하나님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연약함 그 자체였다. 이 말은 시편 22편 첫 절을 인용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가장 연약함과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 찬 구절을 선택하셨을까? 뒷부분에 있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시22:23)라는 승리 구절을 인용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이유는 그 말씀이 지금 자기로 말미암아 실제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고 했다(합1:1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린 자가 자기 아들이었지만 인간의 죄를 짊어지셨기에 얼굴을 돌리실 수밖에 없으셨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 죄를 뒤집어썼으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외면하신 것이다.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계셨고, 육체에 거하는 동안에도 아버지와 끊임없는 교제를 누리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버림을 당하셨다.
지옥이 어떤 곳보다 고통스러운 장소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철저히 외면하시는 곳, 하나님의 긍휼함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지옥을 방불할 만한 고통까지 경험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인간이 당할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야 “다 이루었다”며 승리의 외침을 내뱉으시고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며 숨을 거두셨다. 이렇게 인간이 당할 육신적, 정신적 고통은 물론 영적 고통까지 다 받으신 것이 십자가 형벌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짊어졌어야 했고, 그 모든 고통도 우리가 당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고난을 대신 담당하셨고 그 덕분에 우리가 살았다. 감사하다고 말하기에도 벅찬 사랑이다. 이제 고난주간이다, 염치없지만 십자가로 이루신 사랑을 우리는 또 부활을 소망하면서 생명으로 소유해야 한다. 이 사랑을 알지 못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사랑을 전해야만 한다.
장항진 목사
도서출판국장
위 글은 교회신문 <42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