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8-19 10:29:26 ]
#1. 2015년 8월 15일, 올해로 광복 70주년과 건국 67주년을 맞이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1948년 8월 15일 건국까지 3년은 통상 ‘해방공간’으로 부르는 시간대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수립되기까지 3년간 한반도는 치열하고도 격렬한, 그리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광복 후, 건국 과정은 절대로 순탄치 않았다. 일본은 한민족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에 백기를 들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치안 유지는 그 책임을 맡은 미국과 소련이 담당했다. 건국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고 힘들었던 이유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건국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미국과 소련의 군정 아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소련은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는 계획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1946년 2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웠고, 인민민주주의적 ‘토지개혁’ 등을 추진해 나갔다.
소련이 그 같은 일을 벌이는 동안, 미국은 군정(軍政)을 펼쳐 한반도 모든 세력을 아우르려는 ‘민주적’ 방법을 찾아, 좌우합작을 통하여 한반도에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 결과 북한에서는 소련 군정의 후견 아래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했고,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위원회 운동을 통해 정권 장악을 시도했다. 소련 군정은 막힘없이 북한 공산화를 추진했지만, 미국 군정은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방해 공작에 ‘민주적’ 방법을 실행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인 상황이 발생했다.
#2. 이 상황에서 돌파구를 연 사람이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의 타협이 전제되는 방식으로는 독립국 수립이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확신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기대를 접고, 유엔을 통해 문제를 풀고자 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직접 외교에 나서서 미국과 유엔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승만은 비장한 결심으로 1946년 11월 미국으로 향했다. 공산주의의 위험과 미 군정의 유화정책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렸다. 수개월에 걸친 이승만의 노력은 드디어 결실했다. 1947년 4월 미 군정 사령관 하지는 “통일조선정부 수립은 소련 측이 협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고, 1947년 9월 미 국무장관 마셜은 조선의 독립 문제를 유엔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가 지금에야 바른 길을 잡아서 나아가게 됐다”고 논평했다.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사항을 우리 민족이 거부하고, 유엔이 한국 문제를 다루고, 남북이 총선에 의하여 독립국을 건설하는 여정에서 이승만의 혜안과 외교 능력은 단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광복 3년 만인 1948년에 광복이 이루어진 그날 대한민국은 건국을 하게 됐다.
하지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건국 과정에서 이같이 초인적 노력을 경주하는 동안, 소련과 북한의 김일성, 그리고 남한의 박헌영 세력이 얼마나 집요하고도 악랄하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했는지도 주목해야 한다. 박헌영은 소련의 공작금을 받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남한 경제를 교란했다.
#3. 박헌영은 미 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했다. 하지만 북한에 머물면서도 남한 공산주의자들을 지휘하여 혼란에 혼란을 가져왔다. 1946년 10월 대구 폭동, 제주 4.3사건, 여순반란 등 박헌영은 해방공간 3년을 불법, 파업, 폭동과 학살로 물들였다. 김일성 역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한답시고 재산몰수, 추방, 학살, 숙청 등으로 북한 전역에 공포정치를 실현했다.
김일성은 유엔 감시에 의한 총선은 거부하면서,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그들만의 선거를 실시했다. 남로당은 북로당 지시를 따라 제주 4.3사건 주모자인 김달삼을 북으로 보내어 남한 대표자 행세를 하게 했다. 김일성은 선전에 필요한 공작을 꾸민 후, 8월 15일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을 선언하자, 곧이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불법 정권의 출발을 선언했다.
대한민국에 반역하는 불법적 분리주의 정권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결국 유엔은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결의했다. 해방 후 3년간 민족 지도자들은 대부분 좌익세력을 등에 업거나 좌우 합작을 줄기차게 외쳤다. 만약 이승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공산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데 전혀 이의가 없을 것이다.
정재형 편집장
위 글은 교회신문 <44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