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10-28 01:50:59 ]
누구나 행복하길 원한다. 어떤 이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행 통장에 찍힌 금액이 늘어날수록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흐뭇해한다. 하지만 재산이 늘어날수록 행복은커녕 늘 불안하다. 재산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재산을 늘리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여류소설가 장덕조(張德祚)는 『누가 죄인이냐』라는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행복이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물풀같이 허황한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난의 바다를 지나 그 바닷속 깊숙이 잠겨 있는 진주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진주와 같은 행복을 따기 위해서 깊은 슬픔의 바닷속에 갖은 고난을 헤치면서, 잠겨 들어가야 한다.”
마치 행복을 얻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설사 행복을 손에 쥐었다고 해도 행복은 곧바로 사라진다.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입고 일하는 일상사는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행복은 순간이고 고통은 늘 함께하는 동반자처럼 느껴진다.
지식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아는 것이 힘(Knowledge is power)’이라는 영국 속담처럼, 지식이 많으면 명예와 권력이 따라올 수 있다. 그러나 지식으로 얻은 행복도 ‘순간’으로 끝난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세상에서 행복을 찾다 보면 결국 허무로 끝을 맺는다.
이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 교수(전 문화부 장관)는 ‘나는 왜 예수를 믿어야 했나’라는 간증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성은 울지 않습니다. 분석하고 심판하고 의를 따지기 때문에 지성은 차고 명증(明證)하고 투명합니다. 그래서 지성의 눈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죠. 눈이 흐려지면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지성의 눈은 아주 맑고 명료한 호수처럼 되어야 합니다. 결국, 제가 흘린 눈물은 지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감성, 감정 그리고 사랑이죠. 이것은 지성의 무력을 의미합니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검사 딸에게 실명 위기가 왔고, 딸의 소원이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이어령 교수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교회에 나갔다. 이어령 교수는 처음으로 예수께 절실하게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하고 계약 하나 하십시다. 만일 우리 딸이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제가 가진 모든 능력 즉, 글 쓰는 것과 입담을 하나님을 위해 쓰겠습니다.”
그 후, 딸이 귀국해서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진단 결과는 실명은커녕 눈에서 질병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이어령 교수는 하나님과 한 약속이 생각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했다.
“아이쿠, 이제 난 끝났다. 이거 하나님하고 맺은 약속 아닙니까. 딸이 나아 기쁘면서도 교인으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되더군요. 그래서 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야. 이건 기적이 아니야. 기적이라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이야. 얘가 눈이 나은 거. 설령 기적이라 치자. 그렇다고 얘가 영원히 사냐? 잠시 조금 봐 주신 것뿐이지’라고 말이죠.”
세상에서 얻는 행복은 잠시 잠깐이다. 영원히 계속되어야 참행복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짓고 영원히 살아야 할 영적인 존재에 사망 선고가 떨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죽음을, 예수께서 대신 고난받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이 속에 참행복이 있다.
정한영 안수집사
(신문발행국)
위 글은 교회신문 <45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