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12-23 13:12:00 ]
갑을관계에서 갑의 횡포가 우리 사회에 빈번히 일어난다. 최근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갑질’이다. 갑질은 권력의 우위를 점하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행위를 말한다. 과거 연예인 성상납 강요, 남양유업의 물량 떠넘기기, 제자를 고문한 인분 교수, 승무원을 겁박한 항공사 땅콩 부사장, 아파트 경비원 폭행과 같은 수많은 뉴스에 국민은 공분했다. 이는 언론에 알려진 극소수 사례일 뿐이다.
사실, 갑을관계는 대등한 계약 주체로서 당사자 사이 권리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다. 그러나 갑은 돈, 권력, 정보라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을은 늘 아쉬울 수밖에 없어 갑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갑(甲)과 을(乙)의 비대칭이 더 벌어지면 갑과 병(丙), 갑과 정(丁) 관계란 말까지 나온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상대를 두고 슈퍼갑, 울트라갑이라 하지 않는가. 급기야,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을 원용해 ‘을사(乙死) 조약’이라고까지 한다. 약자인 을은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좀 과장되게 비유한 것이다. 생사여탈권을 쥐다시피 하는 갑이 제 몫 챙기려 권한을 남용하면 을은 고스란히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당한다. 갑질 사례는 본사와 가맹점, 위탁업체와 용역업체,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업자와 하청업자, 건물주와 세입자 간 계약관계에서 권리행사가 왜곡될 때 흔히 발생한다.
갑을관계는 인간관계에서도 형성되어 있다. 사람들이 갑을관계에 기반하여 상호작용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힘이 비대칭인 상황에 있거나 서열과 권한에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우위에 있는 쪽이 발언권이 세지고 주도권을 쥔다. 이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권력관계가 공고해 을이 갑에 예속되면 민주적·합리적 소통 부재로 왜곡된 갑을관계를 낳을 수 있다.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교수와 학생, 선임병과 후임병, 나이나 연공서열에 따른 상하관계 등에서 발견된다.
갑의 횡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역사는 뿌리 깊다. 중세 신분제의 봉건사회, 근대 고도성장기의 권위주의 시대에 기득권층이 벌인 갑질 행태가 숱하게 있지 않았는가. 을은 갑의 처분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데, 갑의 부당성을 문제 삼으면 묵살당하기 일쑤고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언론.표현의 자유가 발전하면서 이제는 갑의 부당함에 더는 참지 않아도 된다. 위 갑질 사례가 애당초 발생해서는 안 되나, 공분을 사는 갑질은 여론에 호소해 수면에 떠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피해 입은 을을 구하여 정의를 실현하고, 경종을 울려 재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상생하고 법도를 지키는,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 만들기에도 이바지한다. 민주주의는 곧 상대적 약자인 을을 보호하는 제도와 문화의 정착이 요체다. 우리는 누구나 상황에 따라 갑도 되고 을도 된다. 절대적인 갑은 없다. 대통령도 국민에 대해서는 을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을이 돼 본 사람은 갑이 돼서도 을의 처지를 이해한다. 갑이 부당하게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고 을의 권리를 지켜 주는 사회야말로 따뜻하고 행복한 공동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시스템의 온전한 작동과 시민의 인식개선이 요구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기득권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법·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할 부분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민주주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기독교인은 좀 더 특별한 갑을관계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 불평등·불공정의 지배적 갑을관계를 철저히 부정하신 예수님의 공생애를 늘 마음에 품으면서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슈퍼갑의 지위이시면서도 어린양으로, 인간의 모습인 을의 신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 정신을 온전히 함양하자.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하신다. 갑과 을의 평등을 넘어 갑이 자발적으로 을을 섬길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하지 않겠는가?
문심명 집사
25남전도회
국회 상임위원회 근무
위 글은 교회신문 <46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