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6-08 11:24:46 ]
정교분리는 고수해야 하지만 나라 사랑에 더 앞장서야
위기 앞에 절박하게 부르짖는 미스바 기도운동 필요해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한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의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 나라는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을 지키고 있다. 정교분리란 제도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독립성을 지키고 서로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는 미국이나 기독교 전통이 강한 유럽은 물론 아시아 국가 대부분도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정교분리는 국가권력이 종교의 자유를 함부로 침해하거나 간섭하고 종교가 국가운영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원칙이다. 우리나라 헌법도 종교 자유와 국가 중립성에 기초한 정교분리 원칙을 지지한다.
그러나 정교분리를 너무 형식적으로 이해해 교회나 교인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일절 관심을 두지 않거나 국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종교가 이를 외면하고 사회운명에 무심해도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공동체에 위기가 발생하면 그 구성원들의 생존도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또 정치는 사회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이기에 인간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기독교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선한 의무를 다해야 할 뿐 아니라 위기 시에는 더 앞장서야 한다.
일제 치하 기독교가 중심이 된 독립운동은 이런 모습을 잘 보여 준다. 3.1운동 당시 개신교인 인구는 전 인구의 1.5%인 약 24만 명에 불과했지만,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이를 주도했다.
일설에 의하면 만세운동은 고종 황제의 장례일인 3월 3일 전날로 예정되었으나 그날이 주일이었기에 기독교계의 요청으로 3월 1일(토)에 진행했다고 한다.
또 기록에 따르면 삼일운동에 관련되어 체포된 사람 1만 9525명 중 기독교인이 17.6%였고, 일제의 보복을 가장 많이 당한 곳도 교회였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모진 고초를 당하다 죽은 유관순은 대표적 3.1 열사다.
민족주의 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도 교회가 적극적이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중에서 순교했다. 평양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은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언론운동에 기여했고, 해방 이후에는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반탁운동을 전개하다 죽임을 당했다.
해방 이후 평안도에서는 기독교 민족주의 주자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가졌으며 교육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의 주축도 신식교육을 받고 새로운 자산가 계급을 형성한 기독교 엘리트층이었고, 자유민주주의 원리를 채택한 건국헌법에 기독교 정신이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는 반공과 자유주의 이념 정립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독재 시절에는 인권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나라를 잃었을 때는 주권회복에 몸을 사리지 않았고, 해방 후에는 민주주의 확립과 새로운 사회 건설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도움과 원조가 필요한 곳에도 많은 이가 달려가 몸을 바쳤다.
최근 우리 사회는 경제, 안보, 환경 등의 위기 심화와 더불어 사회윤리의 타락과 범죄가 극성을 부리고 연일 터지는 사건·사고로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사회의 위기가 구조적으로 심화하면서 국민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지만 누구 하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총체적 파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파국의 징후들이 연일 불거지고 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절박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은 미스바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하고 부흥의 몸짓을 시작할 때다. 교회는 파수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석 집사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현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48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