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8-07-31 12:04:14 ]
미·중 동북아 주도권 경쟁 가속
김정은도 ‘협상주도권’ 쥐겠다는 의지 드러내
지난 7월 27일은 휴전협정 65주년 되는 날이었다. 애초 휴전회담은 1951년 여름부터 개성에서 시작됐다. 1953년 휴전체결까지 두 해가 걸린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가 가장 컸다.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과 중공군 중 상당수가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했다.
휴전협상의 핵심은 휴전선 확정과 포로송환이었다. 공산군 측은 조건 없는 포로송환을 요구했다. 유엔군 측은 입장이 달랐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포로가 된 소련 군인 중 상당수가 송환을 거부했다. 미국은 이들을 무조건 돌려보냈다.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졌다. 미국 국무부 간부들은 이 전례(前例)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정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고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그 후 국군과 유엔군은 북으로 진군했다. 10월 19일 무렵 압록강 도하를 시작한 중공군 병력 약 25만 명은 한반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1951년 1월 중공군이 평택-원주-삼척까지 내려온 상황이었다. 유엔군은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전의(戰意)가 상실된 상태였다. 유엔은 현 위치 휴전을 제의했다. 중국이 휴전안을 받으면 한국은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직면한다.
미국도 동의한 휴전안은 1월 13일 유엔총회 제1 위원회에서 통과돼 중국에 제시되었다. ▲현 위치 휴전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회담 개최 ▲단계적으로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 철수 등이었다.
휴전 제의 과정에서 유엔과 미국은 한국 정부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한국을 상대로 어떤 논의도 한 흔적이 없다. 우리나라의 운명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1월 17일, 전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국은 휴전안을 거부했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보류했던 중국 규탄 결의안 통과를 본격적으로 추진해 2월 1일 유엔총회에서는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 후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수복했다. 6·25 발발 1년 만인 1951년 6월 24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가 정전(停戰)을 제의했다. 유엔 참전 16개국은 소련의 제의를 공동 수락했다.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 본회담이 시작됐다. 자신들이 불리해지자 휴전협상을 다시 하자고 나선 것이다.
1952년 10월 8일 옥신각신하던 휴전회담이 포로 교환 문제로 무기한 휴회(休會) 됐다. 휴전협정이 지지부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스탈린이 전쟁을 오래 끌어 미국과 중국이 계속 소모전을 벌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1952년 미국 대선에서 한국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당선되고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이승만 대통령은 3년여를 끌어온 전쟁이 통일이 아닌 휴전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휴전에 반대하는 관제 데모를 이끌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은 이승만 제거를 구상하기도 했지만, 달래는 전략으로 나온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국 포로수용소에 있던 반공포로 2만7000여 명을 석방했다. 미국은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겼던 작전지휘권을 회수,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을 달래고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묵인하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미국이 보기에 한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을 만큼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되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65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힘없는 정부가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지금의 대한민국은 세계 5대 공업국, 세계 6대 무역국이다.
하지만 현 상황은 녹록치 않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實戰) 배치한 상황에서 핵 방어망을 구축하는 것도 중국 눈치를 슬슬 보면서 미루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매년 해오던 한미 연합군사 훈련도 잠정 중단된 상황이다. 주변 강대국에 의해 국운(國運)이 결정되었던 과거와 사뭇 비슷한 모양새다.
우리나라의 운명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 결정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북핵 문제 해결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넋 놓고 지켜보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해결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 집은 내가 지킨다’는 확고한 국가관과 정신무장이 필요한 때다.
/정한영 안수집사
신문발행국
위 글은 교회신문 <58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