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12-09 18:45:28 ]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사회
온갖 유혹이 도사리는 물질만능 세상에서
한국 교회가 더욱 솔선해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 가치 일깨우는 견인차 역할 바라
현대사회는 ‘불안’의 시대다. 국내외 정치 상황이 복잡해져 예측하기 어렵다. 기술이 급변하고 ‘불확실성’(uncertainty)도 그만큼 커졌다. 현대인은 짙은 안개 속을 더듬더듬 가야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물질주의’ ‘사회의 치열한 경쟁 분위기’ ‘인간의 욕망’으로 점철돼 불안을 키우고 있다.
예전의 ‘불안’은 천재지변, 전쟁, 질병, 절대빈곤 같은 생존 차원이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다변화하고 경제 분화가 심화해 물질적·정신적 욕망으로 인한 불안감이 팽배하다. ‘더 유명해지고, 더 중요해지고, 더 부유해지려는 욕망’에 따른 불안이 현대사회를 휩쓸고 있다. 이런 측면에 비춰, 국내외에서 일어나고 있는 첨예한 쟁점(爭點)과 여러 현안을 둘러싸고 벌이는 이해관계자(집단)들의 대립과 갈등의 이면에는 공정성·공공성을 가장(假裝)한 채 ‘기득권’과 ‘지위’를 잃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나아가 더 많은 이득과 더 높은 지위를 누리려는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소유욕’과 ‘지위’로 인한 불안이 일종의 사회 특징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루소가 말한 취지에 따르면, 물질적 소유에 집착하고 높은 지위를 추구할수록 욕망은 불안을 가중시킨다.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이런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럭비공이 어디로 튀느냐에 따라 승패(勝敗)가 갈리듯, 불확실성은 현재 누리고 있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흔들 수 있다는 염려를 낳는다.
유럽의 유명 작가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저서 『불안』에서 밝혔다. “현대인은 물질적·사회적 욕망에 이끌려 지위를 확보하지 않으면 무시당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 불안해하고, 인간의 욕구와 세상의 불확실한 조건 사이의 불균형은 이를 부채질한다.” 이는 인간의 ‘속물근성’ ‘지나친 기대감’‘능력 지상주의’라는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이 여기에 더해졌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폐단인 사교육의 부작용과 입시부조리 실태를 보면 이해할 만한 대목이다.
불안(不安)이 인간의 욕망 탓에 생기고 불확실성(不確實性)이 이를 충동질한다는 점에서, 불안을 극복할 해법은 무엇일까. 미래 불확실성을 없애는 동시에 개인 욕구를 모조리 충족하는 이상(理想)사회를 구현하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몽상가적 발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유한성, 그런 인간 본성에 내재한 정욕의 무한성을 고려하면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결국 정욕에 따른 불안을 해소하려면 개인 삶의 태도를 물질주의적 가치 지향에서 정신적 가치 지향으로 돌이켜야 한다. 세속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 기독교 공동체의 성경적 실천이 온전한 영적 가치를 지향할 최고의 해답이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을 섬기려고 몸소 피 흘려 죽으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생애와 그의 정신을 본받아 영적생활을 할 때, 세상의 지위, 명예, 물질에 목말라하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어떤 불안도 떨쳐낼 수 있다. 새로운 한 해, 날로 불확실해지는 시대에 불안감이 팽배하고 온갖 유혹이 도사리는 물질만능 세상에서 한국 교회가 더욱 솔선해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의 가치를 일깨우는 견인차 역할을 하길 바란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6~17).
위 글은 교회신문 <65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