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11-09 15:31:07 ]
‘내 허물에 관대’ 정치권 내로남불
부끄러움 실종한 우리 사회 자화상
자기반성 사라진 뻔뻔한 시대 우려
부끄럼 모르면 금수와 다를바 없어
인간이 도덕적 존재인 이유는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눈치와는 다른데, 양심이나 도덕성이 없다면 타인의 시선이 아무리 강렬해도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다. 사이코패스가 그런 유형이다.
부끄러움 혹은 수치심에 대한 생각이나 기준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그리고 부끄러움의 대상이나 양상도 동서양 차이가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기 어렵지만 큰 틀을 보면 동양에서 부끄러움은 주로 유교적 세계관, 즉 도덕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서양에서는 누드 논쟁에서 보듯 주로 문화나 성적인 것과 관련이 많다. 예를 들어 중세에는 목욕 중 찾아온 손님을 맞기 위해 나체로 나오는 것은 전혀 결례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대형 공동침대를 사용하면서 알몸으로 자는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 용변 뒤처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성과 풍속에 대한 에티켓이 생기고 수치심도 자리를 잡았다. 서양의 부끄러움은 금기와 비슷하다.
동양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주로 도덕적 성품과 관련이 있다. 대표적 사상가인 맹자는 인간에게 네 가지 근본 도덕적 뿌리가 있다고 했는데 그 하나가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수오지심은 올바른 것을 벗어나는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의로움의 뿌리다. 올바른 것의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가 생각하는 의리나 충(忠), 지체에 대한 효와 애정이다.
잘못을 저지를 때 물리적 형벌로 다스리기보다 인간이 가진 본래 속성인 예와 부끄러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유학의 오랜 가르침이다. 각자의 역할과 본분을 강조하는 정명론(定命論)도 이런 전통과 관련이 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 정명론의 요체다. 유학을 지배이념으로 삼던 조선은 유달리 명분과 체면을 중시했다. 물론 이것이 심해져 허례허식처럼 형식으로 흐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사회를 자연스럽게 통제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 감당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도 남을 많이 의식하고, 부끄러움 때문에 행동에 제한을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법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으나 지하철 경로석이나 임산부석을 비워 두거나,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것 그리고 눈치를 살피면서 민폐 끼칠 행동을 알아서 삼가는 것도 내면화된 부끄러움 때문이다. 사람을 야단칠 때도 “부끄럽지도 않느냐?”라고 말한다.
그런데 최근 이런 부끄러움이 점점 실종되는 것 같아 우려된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줄여 이르는 말)’이라는 신조어에서 보듯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신의 허물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중 행동이 너무 많다. 또 금세 드러날 거짓말을 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얼굴이 많이 두꺼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오는 후보들에 대한 비호감이 역대 최고로 크다는 것도 부끄러움이 사라진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정치인이 성직자는 아니기에 도덕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품격은 필요한데, 그렇지 못해 정치에 관여하기를 싫어하는 국민이 너무 많다. 부끄러움이 사라지면 악덕이 자리를 잡는다. 하나라도 더 자기 것을 챙기면서 남을 짓밟으려는 야수의 탐욕과 폭력이 고개를 들 것이고, 도덕이나 교화가 아닌 법에 의한 강제가 지배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이 부끄러움이었다. 부끄러움은 인간이 죄인이자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부끄러움을 전혀 못 느낀다면 사람이 아니라 사단의 족속이다. 체면 때문에라도 양보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명분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고리타분한 시대가 가끔 그리워진다.
위 글은 교회신문 <72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