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11-17 12:24:04 ]
지난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에서
한국 지위 ‘개도국→선진국’ 격상
경제력 외에도 포용·화합·나눔 등
선진국다운 품격 갖춰 성숙해지길
고된 시골생활, 콩나물시루 같은 학교, 전국을 서열화한 학력고사, 군사정권과 민주화의 지난한 투쟁 등. 1960년대에 태어난 필자는 지난날을 살아오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난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에서 우리나라가 A그룹(아시아·아프리카)에서 B그룹(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하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1964년 국제연합유엔무역개발회(UNCTAD) 설립 이래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한 첫 사례이자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B그룹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2018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달러를 돌파했다. GNI 3만 달러는 선진국 진입의 기준으로 인식된다.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GNI)은 3만2860달러로 이탈리아(3만2200달러)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던 1953년 당시, 1인당 GNI가 불과 67달러이던 한국이 70여 년 만에 거둔 쾌거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여섯째로 큰 무역을 하는 원조 공여국이다.
현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가 봐도 경제적으로 부자나라이고,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변경된 최초의 나라임이 분명하다. 우리 선배들부터 현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모든 이가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이니, 우리나라가 선진국임을 기분 좋게 인정하고 우리가 마음속에 그리던 이상적인 선진국 국민의 도리도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이제부터는 경제력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군사, 보건 그리고 시민의식까지 모두 인정받는 진정한 선진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선진국에 걸맞은 품격은 아량과 포용, 여유와 화합, 나눔과 섬김 등의 가치를 들 수 있다. 경제가 가장 빠르게 성장했지만, 골고루 성장하지 못한 어두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압축 경제성장과 압축 민주화 등 선진국이 백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경험한 발전 과정을 50년의 짧은 시간에 겪은 데 따른 부작용들이 있다. 지금은 고령화와 저성장이라는 우리 경제의 어려움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방종과 질서파괴, 진실을 짓밟는 거짓과 불법을 버리고 성숙한 시민의식, 책임 있는 자유, 남을 배려하는 성숙한 사회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많이 가졌다고 흥청망청하며 사치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자리를 나누고 아픈 이웃을 돌아보면서 봉사와 섬김에서 보다 큰 삶의 만족과 보람을 찾아야 한다.
기업과 기득권 보호에 앞장서는 정치나 언론도 대다수의 약자와 서민을 위하는 정치와 보도를 통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꽁꽁 묶인 사회 조직들도 자기들의 이익만 우선하지 말고 나누고 섬기고 아량으로 감싸 안고 여유를 가지고 상대와 화합하는 조직으로 변해야 한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 각 당에서는 후보자 선출을 위해 여러 절차를 진행했다. 막말과 인신공격 같은 후진국 병에서 벗어나 정책과 실천방안을 가지고 토론하는 성숙한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
기독교인들도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없도록 주변을 살펴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코로나19가 시작된 이래 매일 지역사회 방역을 대가 없이 진행하고 있다. 또 성도 수천 명이 생명 나눔 헌혈행사를 올해만 세 차례 실시했다. 나아가 못 먹는 이웃이 없도록 목양센터에 상시 쌀을 비치해 누구나 가져가 배고픔을 면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어 기쁘지만 어두운 면이 있다는 사실도 같이 인지해야 한다. 중산층이 두터워야 하는데 빈부 격차가 커지고 극단적인 양극화가 가속화하면서 사회 갈등이 생기고 일부에서는 자살과 노인빈곤이 나타나고, 일부에서는 퇴폐와 향락으로 치닫고 있다. 이를 방치하면 결과적으로 진정한 선진국은 요원해지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존립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72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