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탕자를 품은 아버지 마음

등록날짜 [ 2021-12-29 18:13:07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25~32).


우리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께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집을 나간 둘째 아들 같은 죄인들임에도 이제나저제나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알려 주셨다. 우리나라도 그렇겠지만 이스라엘 역시 부모에게 “내 몫의 유산을 달라”는 말은 “빨리 돌아가시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그런 패륜(悖倫)도 모자라 재산을 유흥으로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애타게 기다리다가 멀리서부터 뛰어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아들의 신분을 복권시키며 잔치를 연다. 그때 모범생이던 형의 질투는 어쩌면 교회 안의 착해 보이는 대다수 기독교인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죽어도 좋으니 너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고 살아야 한다”는 주님의 심정을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가 받았다면 탕자의 비유 속 형이 가졌던 사회와 교회 속의 차별과 판단을 부단히 갈아엎고 주님 마음으로 바꿔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정직히 고백하건대 담임목사님께서 매일같이 “북한 김정은도 예수 믿고 회개하여 북한의 굶주림과 핵무장과 폭정을 그치고 구원받아 천국 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실 때마다 필자는 ‘김정은은 지옥 가야죠. 그렇게 수많은 믿음의 형제자매를 처참하게 순교시키고 주민들에게 악행을 저지른 XX인데…’라고 내 죄인됨도 망각하고 하나님 자리에 오르곤 했다. 전형적인 탕자의 형 콤플렉스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자리에 앉아 내 마음대로 지옥 가야 한다고 저주하고 심판한 사람 그리고 국가, 민족, 집단, 부류가 얼마나 많을까? 많을수록 아직 주님과 멀다는 증거다.


10여 년 전 소천하신 옥한흠 목사님은 과거 담임하던 교회가 강남역 근처에 있던 시절, 유흥가가 교회 근처에 밀집된 것을 외면하지 않고 ‘우물가선교회’를 만들어 전도하셨고 많은 결신자가 나왔다.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전 성도 앞에서 “많은 결신자가 교회에 오게 되었지만 그 귀한 분들이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누가 이분들을 발붙이지 못하게 했습니까? 겉으로는 환영한다고 하면서도 뒤로 수근거리는 여러분들 아닙니까?”라며 성도들과 함께 애통해했다. 그 정직함이야말로 주님의 심정이요, 한국 교회의 희망이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성경에서 죄라고 명한 조항을 일체 발설조차 못 하게 강요하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뿐이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차별도 의미 없는 사람들이다. 주님 나라에서는 출신 국가, 민족, 인종, 학력, 성별은 의미조차 없다. 예수님 족보에 들어간 이방 여인, 기생, 불륜 관계조차 하나님은 미화 없이 포용하셨다. 이런 것으로 트집 잡아 편 가르고 왜곡하고 싸움 붙이는 세력은 따로 있다. 동성애의 폐해를 의사로서 현장에서 너무나 절감해 어디도 받아 주지 않아 피폐해진 환자들을 위한 요양병원을 운영하고, 동성애 AIDS 환자들을 돌보는 염안섭 수동연세요양병원장이 차별금지법의 모순과 싸우고 있다고 해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세상이 기독교인을 또다시 왜곡하거나 이런저런 허물들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말하면 내 안에 또 ‘탕자의 형’ 병이 도진 것은 없는지, 지혜롭지 않은 말실수로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는지 돌아보고 회개하자. 흑인의 출입을 막는 백인 교회라든가, 끼리끼리 문화가 자리 잡은 모임이라면 거기에 예수님은 안 계실 터다.



위 글은 교회신문 <730호> 기사입니다.


박성진 집사
연세오케스트라상임단장
㈜한국M&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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