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2-01-25 13:50:16 ]
코로나19 팬데믹이 3년째다. 코로나19 사태는 전 세계 밸류체인(value chain)과 문화에도 근간을 바꾸는 변화를 끼쳐 혁신을 가져왔고, 한국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비록 교회에 큰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나, 교회에 나갈 수 없게 된 많은 기독교인이 유튜브,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성령께서 메신저로 사용하신 일꾼들의 메시지를 교회·교단·교파를 초월해 듣고 은혜받는 사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도 했다. 성령께서는 코로나19 기간에 매체 전도자들을 사용해 애통해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성경 말씀과 간증,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영적으로 갈급해하던 이 땅의 심령들이 은혜를 찾으며 구텐베르크의 활자성경처럼 복음에 눈뜨는 역사도 일어났다. 교회, 교단, 교파 등의 독선주의가 얼마나 허탄한 논쟁인지도 은혜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터넷 교회가 온전할 수 없다. 물리적 장소로서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곳,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곳, 성도가 모여 교제하는 곳이며, 인터넷 매체로 구경(watching)하던 곳과 달리 여럿이 참여(participation)하는 곳이다. 문화인류학에서는 구경(watch)과 제사(ritual)의 차이를 다수의 구성원이 ‘참여자’인가 ‘제3자’인가의 관점에서 나눈다. 일례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회중찬양조차 ‘구경’일 때가 있고 ‘참여’일 때가 있다.
이제는 해외에서도 한국인을 ‘떼창 민족’이라고 칭할 정도이다. 유명 팝스타들이 내한 공연을 오고 싶어 안달인 까닭은 한국에서 공연하면 청중이 하나 되어 음악에 맞춰 함께 노래하고 뛰고 손뼉을 치는 등, 구경꾼이 아닌 함께 공연하는 주체로서 가수와 관객 모두 큰 감동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프로듀서들도 관객 소리가 들릴 만큼 공연장 볼륨을 조절해 한국 관객을 참여자로 끌어들인다.
세상 음악도 그러한데, 성령께서 임재해야 할 교회음악을 새 노래로 찬양하면서 구경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지난해 BTS가 미국 LA에서 2년 만에 공연한다고 했을 때 전 세계에서 40만 명이 LA로 몰려들어 도시가 마비되고, 외국인들이 한국말로 떼창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이 같은 일이 코로나19가 끝난 후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오히려 교회 성도들은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영으로 감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데도 여전히 교회음악에서도, 또 커뮤니티로서도 지금의 독선으로는 어려워 보인다.
초대교회의 묘사를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름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행2:46~47)라고 성도들의 회식이 여러 번 등장한다. 구약시대에도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우양의 처음 낳은 것과 너의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너의 낙헌예물을…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워하며 나눠 먹으라”(신12:17~19)고 하셨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자녀와 노예와 같이, 소유가 없는 곤궁한 자들과 주님 일만 하느라 소유가 없는 자들과 나눠 먹는 것을 십일조와 첫 열매의 예물로 인정하실 만큼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는’ 의미는 크다.
그만큼 코로나19로 교회가 받은 교제의 타격은 “같이 밥 먹는 게 뭐 대수”냐고 말할 문제가 아니다. “누구와 가장 친한가”라는 피상적인 질문보다 확실한 것은 “누구와 밥을 가장 많이 먹었느냐”이다. 괜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조반을 짓고 계셨던 것이 아니다.
코로나 펜데믹은 예배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교제에 타격을 주었고 작은모임들까지 중단하면서 받은 충격은 실로 크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교회는 세상의 계략을 넘어 공동체를 회복하고 고립되어 고통받는 성도까지 포용하는 방법을 고심해야 한다. 세상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교회와 공동체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거든 교회는 어찌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발 들이게 하고 공동체 모습을 회복할 지혜를 쥐어짜야 한다.
백신패스가 없으면 친구도 만날 수 없게 된 지금, 문둥병자 무리도 마다 않으신 주님처럼 섬기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또 암 투병 환우들, 기저질환 성도들, 백신을 맞을 수 없고 맞아서는 안 되는 지체들에게 문턱을 높이는 기억의 쓴 뿌리를 남기면 안 된다.
위 글은 교회신문 <73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