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 내 인생의 지휘자

등록날짜 [ 2008-11-25 15:20:27 ]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데리고 교회 기도처소에 가서 밤새도록 철야기도를 하셨다. 열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그 때 어머님이 눈물 흘리며 기도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 당시 우리 집은 홍제동에서 석유가게를 하였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어머님께서는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하시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어린 나는 왜 그렇게 어머님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어머님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 눈물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것은 자식과 가족의 영혼, 이웃의 영혼을 위한 사랑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션스쿨인 숭실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하셨고, 그곳에서 음악선생님께 발탁되어 성악을 전공하고 합창반 활동을 하면서 다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때 그 유명한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라는 곡을 수천 번 이상 불렀다.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찬양하였지만 그 기도의 내용처럼 살진 못했다. 다시 찬양이 아닌 세상 노래를 부르며 그것에 미쳐 살았다. 급기야 대학교 3학년 때 급성후두염으로 고생하며 제대할 때까지 6년 동안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지만, 마지막 실기시험은 거의 꼴찌에 가까웠으며 졸업도 간신히 하였다. 수없이 많은 방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절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만난 아내는 목회자 집안의 딸이었다. 아내와 결혼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서서히 변화시키셨고 다시 신앙생활에서 이탈치 못하게 강권하셨다. 장인어른(성결교 증경 총회장이셨던 故 김현명 목사)의 축복 기도를 받을 때마다 내 몸과 영혼 안에 내재된 주님의 나를 향하신 뜨거운 사랑과 어머님의 눈물의 기도를 떠올리며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에도 장모님과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의 기도가 나의 든든한 신앙의 자산이 되었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지휘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로 내 인생의 새로운 삶을 연세중앙교회에서 시작함을 감사드린다. 찬양할 수 없었던 부족한 인생을 십자가 보혈로 구원하시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찬양하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연세중앙교회 성도들의 섬김과 사랑을 통해 나를 인도하셨음을 감사드리며, 매 예배마다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깨닫게 하고자 매 시간마다 피를 토하듯 외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며 영혼의 때를 준비하는 신부의 믿음을 갖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싶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온 몸 다해, 온 맘 다해 찬양하며 살기를 원한다. 아멘!

위 글은 교회신문 <14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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