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한낱 평민이 왕궁으로 가는 일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일 왕궁으로 가려면 어떤 특정한 조건들을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하거나 또는 왕비의 가족이 되거나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는 등의 일들을 통해서만 왕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왕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거나, 왕을 위해 신하가 되는 일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고, 뽑히고 뽑힌 사람들 중에서도 특출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 나온 요셉의 인생은 왕궁으로 가는 길과는 전혀 무관한, 비참한 밑바닥을 기고 있었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고 게다가 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도 감옥생활을 2년 이상 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비참함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떠나 타국에서 사는 것만도 억울하고 속상한데 누명을 쓰고 어둡고 침침한 애굽의 감옥에 떨어진 요셉의 생애는 그야말로 더 이상 소망이 없고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빛이 더 밝게 비치듯이, 가장 어두운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 오듯이, 그가 감옥으로 떨어지는 길은 결과적으로 왕궁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역설적인 길이었습니다. 감옥으로 가는 길이 왕궁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말입니다. 감옥으로 떨어지는 길은 그가 왕을 모시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결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권세의 자리인 왕궁의 높은 자리로 올라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은 감옥으로 가는 길조차 왕궁으로 가는 길로 바꾸어 주시며 복을 누리게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수록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그러한 반응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러나 위기(危機)란 위험(danger)과 기회(chance)라는 말과 같이 감옥과 왕궁은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파멸이나 고통으로 끌어들이는 문제가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고 있는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감옥 같은 삶을 살게 만들든지 또는 하나님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기회가 되게 만들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이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 위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코 당신을 파멸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왕궁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신앙이라고 부르며 이 부활신앙은 기독교신앙의 가장 한복판에 있는 소중한 믿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5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