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한복음을 10년 넘게 집중적으로 연구한 바 있다. 슈나켄버그(R. Schnackenbugr), 브라운(R. Brown), 비즐리-머레이(G. R. Beasley-Murray), 바렛트(C. K. Barrett), 불트만(R. Bultmann), 그리고 애쉬톤(J. Ashton) 등과 같은 대학자들의 요한복음 관련 저술들을 접하면서 느꼈던 기쁨과 전율 그리고 도전은 잊을 수가 없다.
옥스퍼드대학교의 객원교수 시절에는 애쉬톤 교수의 강의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지적 호기심이 학자의 육성을 통해 성취될 때는 내가 그 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요한복음은 내 신학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어쩌면 내 신학의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연구하면서, 나는 많은 갈등을 하기도 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표현들의 어떤 부분이 비유적인 상징이고 어떤 부분이 문자인지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나에게 극적으로 다가왔던 말씀은 요한복음 7:38-39절이었다(“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내 삶의 신학적 전환점 이전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을 비유적인 상징으로만 받아들였다. 이를 토대로 요한복음을 이해했고, 이를 토대로 글을 쓰기도 했고, 이를 토대로 성령을 체험한다고도 했다. 기도할 때 몇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깊이 체험하는 것이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보듯 손으로 만지듯 체험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었다. 수많은 신학 서적과 이론과 학교강의와 행정의 틀 속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면서 그 분의 임재가 골수까지 들어오는 강렬한 체험을 사모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그 때’를 경험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이 나에게 문자화 되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부르짖는 기도! 성령의 뜨거운 임재와 기도의 영이 부어졌을 때 기도가 내 배에서부터 터져 나온 것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신학적인 지식에서, 묵상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도 가질 수 있겠지만, 나는 배에서부터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철저하게 경험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니 부르짖는 기도가 살아나고, 부르짖는 기도가 살아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체험한 것이다. 내 삶이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 경험 이후부터, 요한복음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른 성경들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기 시작했다. 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던 성경 구절들 사이의 간극들이 신앙의 눈으로 해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요한복음에 관한 글을 쓸 때도 이 경험은 문의 경첩과 같이 늘 글의 중심축이 된다. 아주 단순한 명제가 아니었던가?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니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이 고백의 연장으로, 『상징으로 읽는 요한복음서』 란 제목의 책을 집필하고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6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