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한 우리말 중에 ‘멋’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 의미로 ‘멋’은 ‘차림새나 행동 등이 세련되고 아름다움’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멋’이란 삶의 여유이고, 그런 여유는 인간의 창의성을 통하여 문화로 꽃피기도 한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여유와 멋을 찾는 우리들이 신앙생활 속에서도 멋을 추구할 수 있다. 마태복음 5장 40절과 41절에서 예수께서는 신앙인의 멋을 잘 설명해주셨다.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까지 함께 가는 여유, 그것이 곧 신앙의 여유요, 멋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멋은 보복에 관한 예수의 교훈과 관련이 있다. 구약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원칙이 중요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동량형벌법’ 혹은 ‘동해복수법’이라고 부른다. 이 법은 복수를 정당화시키거나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본 것보다 더 큰 보복을 금지시키는 소극적 의미와 함께, 생명을 중시하며 범죄를 예방하는 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건전한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서 ‘주고 받음’의 미덕을 꼽는다. 그런데 주고받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베푼 만큼 받지 못하면 그만큼 마음의 상처가 생길 수 있다. 또한 받았으니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마음과 마음의 주고받음을 가로막는다. 예수께서는 동량형벌법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더라도 거절하지 말고 오히려 여유 있게 더 많은 것을 스스로 내어주라는 것이다. 오른편 뺨을 때리는 자에게는 왼편 뺨도 돌려대며, 겉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는 속옷까지도 주며, 오 리를 가고자 하면 십 리를 동행해 주라는 것이다.
멋은 기본적인 것이나 꼭 필요한 의무적인 것을 뛰어넘어 추가적인 요소를 의미하는 것처럼, 신앙인의 멋 역시 여유 있게 주고 베푸는 삶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된다하더라도 여유 있게 베푸는 삶, 해야 할 일만 마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더 큰 관심과 도움을 베푸는 것, 그것이 멋진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준 만큼 받고 싶고 피해를 본 만큼 보복을 해야 마음이 풀리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심리 상태인데,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더 줄 수 있을까? 세상의 잣대로 보면 그것은 매우 멍청한 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아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이 땅에서의 손해는 손해가 아니며 더 크고 귀한 것을 소유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어느 것으로도 갚을 수 없는 너무도 큰 빚을 탕감 받은 자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있으며, 그 나라에서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보상이 있다. 지금은 그 날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마치 농부가 추수를 기다리며 씨를 뿌리듯이,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과정이다. 사도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게 될 위로와 상급을 바라보는 것과 직결되어 있었다(딤후 4:7, 8). 내세가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의 손해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더 큰 것을 얻는 거룩한 과정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