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변화, 천기(天氣)를 읽는 것이 권력의 기반이었던 때가 있었다. 일식과 월식에 대한 은밀한 계산을 통해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과시하는 미실과 덕만 공주의 대립을 부각시키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은 이러한 것을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천기를 읽을 수 있는 자가 갖고 있는 천권(天權)이 미실에게서 덕만 공주로 옮겨가면서, 드라마는 권력의 진정한 의미, 혹은 지도자의 본질적인 자질을 생각하게 한다.
미실은 자신의 천권을 이용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백성 위에 군림하려 했다. 그러나 천권을 이용하여 권력을 손에 쥔 덕만 공주는 그 천권을 독점하려 하지 않으며, 권력의 근간인 천권을 백성에게 돌려주었다. 더불어 삼한일통(三韓一統)이라는 신라의 꿈을 백성들의 희망으로 바꾸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또한 꿈을 갖고 있다. 혹은 꿈을 갖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모든 꿈이 희망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절망을 주기도 했으며, 차라리 그 꿈을 꾸지 말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수님도 꿈을 꾸었던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꿈 때문에 무엇을 했는가? 예수님은 그 꿈을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되었던 자신의 신분을 버렸다. 가지 않아도 되었던 고난의 길을 가며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렀다. 그의 꿈은 죄인인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력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하여, 죄인이었던 우리는 예수님의 꿈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과분한 이름을 얻었다. 신권을 가진 예수님이 그 힘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킨 방법은, 꿈이 어느 때에 희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만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위해서 꾸는 꿈은 희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좋은 꿈도 될 수 없다. 꿈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길, 다른 이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때 꿈은 희망이 되고 그 희망은 모두를 살리는 생명이 된다. 자신의 힘을 확장시키려는 미실의 꿈은 야욕(野慾) 혹은 야망(野望)과 분리될 수 없었다. 반면, 자신의 힘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려는 덕만공주의 꿈은 희망(希望)이라는 보기 좋은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덕만공주의 꿈은 나약한 신라에 희망을 주어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예수님의 꿈은 죄인인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꿈을 꿀 것인가? 우리의 꿈이 어떻게 희망이 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있는 사랑과 관심을 다른 이들에게 돌리는 것, 다른 이들의 필요를 헤아리고 그것을 채워주려는 것, 그것이 야망으로 가득 찬 꿈을 희망으로 만드는 길이 아닐까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6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