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등록날짜 [ 2009-12-01 18:15:07 ]

‘아름답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일상생활 속에서 흔하게 쓰이는 말이지만 그 개념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것은 미(美)라는 개념 자체가 난해하기 때문이기보다는 어느 하나로 고정시킬 수 없는 다변성의 근원적 개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본질적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름다움의 본질은 살아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미모를 갖춘 절세미인이라고 하여도 생명의 호흡이 끊겨지면 싸늘한 시체에 불과하다. 물살을 힘차게 가르며 헤엄치는 물고기는 보기만 해도 시원스럽지만, 죽은 물고기는 보기에도 역겨운 흉물로 뒤바뀐다.
‘살아있음’은 단순히 숨을 쉬는 호흡이 붙어있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영원한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들에게 근원적 생명을 주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자기희생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곧 우리들에게 어떠한 죽음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영원한 생명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미, 곧 ‘생명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드러내는 하나님 생명의 작은 반사체들이다.
‘아름다움’의 또 다른 현주소는 생명 속에서 고상하게 간직되어 있는 ‘순수의 미’, ‘진실의 미’이다. 갓 태어난 갓난아기의 눈 속을 들여다보라. 아무 티도 없이 맑고 깨끗한 모습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지고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갓난아이는 성장하면서 점차적으로 그 순수함을 상실한다. 성경은 이 순수의 모습을 지켜줄 수 있는 또 다른 생명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생명이며 성령으로 말미암는 거룩한 삶이다.
‘아름다움’의 또 다른 모습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의 몫을 다하는 성실함 속에 담겨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의 본래적 임무와 기능이 주어져 있다. 냄새나는 외양간의 소 여물통이 외형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외양간의 제자리에 놓여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한다면, 적어도 가치적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밀레의 명작 ‘만종’에 등장하는 두 부부의 모습은 가장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의 참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서있는 장소가 땀 흘리면서 종일토록 일한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삶의 현장 속에서 자기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기도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창조주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신앙의 곡선과 성실한 삶의 곡선이 마주치는 두 좌표 위에 조용히 서있는 그들은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성실히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운 모습이 삐뚤어진 가치관 설정에 의하여 점차 퇴색되어 감을 볼 수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의 생명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 신앙은 또한 순수하고 거룩한 삶으로의 부름이기도 하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적 목적과 우리들이 서 있어야할 분명한 삶의 좌표를 발견하게 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7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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