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희망이 없던 시절, 하늘의 천기를 읽으며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던 이방의 박사들은 하나의 ‘별’을 발견했다. 범상치 않은 별을 쫓아 이스라엘까지의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박사들의 이야기는 포악하기로 소문났던 헤롯왕에게까지 전해졌고, 왕은 ‘별’로 태어난 아기를 찾으면 자신에게 말해 달라고 그들을 꼬드기며 명령했다.
‘꼬드김’은 달콤했고 ‘명령’은 지엄했을 것이지만, 박사들은 태어난 아기에게 무릎 꿇고 그들이 가져온 예물로 그의 왕 됨을 선포한 후에, 헤롯을 배반하고 먼 길을 돌아갔다. 꼬드김과 명령 뒤에 있었던 왕의 음흉한 속셈을 알아차린 때문이었다. 자신 외에 다른 별을 용납할 수 없었던 헤롯은 급기야 당시에 태어난 2살 이하의 아기들을 모두 죽이는 만행을 주저하지 않았다.
헤롯의 야심 때문에 죽어간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의 눈물, 왕을 배반하는 박사들의 위험천만한 모험 속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새로운 왕의 등장을 선포한다. 포악한 죽음의 땅에서 솟아난 예수님의 생명은, 생명을 짓밟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생명만 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탄생이 다른 아이들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불행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거꾸로 그것은 죽음이 만연한 세상, 자신을 위해 다른 이의 생명을 파리 목숨같이 여기는 세상에 대해서, 그들이 아무리 죽여도 죽일 수 없는, 그들이 아무리 짓밟아도 짓밟히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의 여전함을 선포하는 사건이다.
세상에 온 ‘별’의 의미는 바로 이것, 하나님의 생명의 고귀함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이 땅에서 생명의 고귀함을 지켜내는 일이 쉽지 않음을 또한 보여준다.
어느 날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하늘의 별만을 바라보고 걷다가 웅덩이에 빠진 일이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트라키아 처녀가 탈레스를 비웃으며, “그는 하늘에 있는 것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코앞에 있고 발밑에 있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는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방 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그 ‘별’이 땅에 왔다는 것을 알고, 세상의 폭력 속에서 그 ‘별’의 의미를 지켜낸 자들이다. 하늘에 대한 희망으로 땅의 웅덩이를 건넌 자들이다.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단순히 별을 기뻐하며 그것의 화려함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 빛을 볼 수 있도록 곳곳에 놓인 웅덩이를 메워 주는 것이다.
‘별’을 버리라는 ‘꼬드김’과 ‘명령’은 이방 박사들의 것만은 아니다. 우리 앞에는 더 깊고, 더 많은 웅덩이들이 있다. 죽음의 위협에서 ‘별’을 지킨 자들의 믿음 앞에서,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어떻게 ‘별’을 지켜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또다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에, ‘별’이 빛나는 세상을 만들 믿음은 무엇일까?
위 글은 교회신문 <17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