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9-21 11:02:14 ]
신념과 지식으로 아는 예수는 의미 없어
성령으로 그를 ‘경험한 자’만 구원받아
신념을 신앙으로 오해하는 때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념(信念)은 ‘굳게 믿는 마음’이며, 신앙(信仰)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일’입니다. 신념과 신앙의 사전적인 의미의 차이는 영원한 차이를 만듭니다.
한번은 예배를 인도하다가 교회에 잘 출석하며 성실해 보이는 청년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적절한 내용의 기도에 은혜를 받았는데, 그만 마지막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며 끝을 맺었고, 곧이어 참석자들의 거룩한(?) 폭소가 터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즉 나에게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실 때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신념을 지녔는지 아니면 신앙을 가졌는지에 따라 교인과 그리스도인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교회고, 이 교회에 속한 사람이 교인이기에 이 둘을 구분한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그러나 교회의 출입이 자유로운 현실에서는 이 구분을 필요하게 만듭니다.
김영삼 대통령 정부는 1993년도에 34년 동안 수감생활 하면서도 사상 전향을 거부한 이인모 노인을 북한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는 북한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감옥생활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은 이인모 노인의 신념은 마치 신앙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그를 영생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기독교적인 이념이, 역사 속 인물인 예수의 사상과 가르침을 따르는 신념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가끔은 신념으로 사는 것 같은 신앙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이념을 가지고 사회운동을 하며, 교회생활과 교회사역을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생활 윤리를 통한 실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성경 말씀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관점이 더 중요합니다.
간혹 목회자나 집사님의 자녀 중에서, 기독교 가정과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 중에서 신념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서구 사회가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발전했지만, 오히려 이 문화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게 하는 분명한 회심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의 쇠퇴는, 철저하게 자신을 찢는 고백과 성찰 없이 교인을 만드는 문화의 영향도 큽니다. 신념과 이념으로는 ‘예수’가 나에게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이론을 뛰어넘는 체험이며 이 체험이 삶의 변화를 수반하는 생활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불변입니다(고전12:3). 성령께서 함께하는 삶은 ‘하는 기도’에서 ‘되는 기도’로, ‘믿는 것’에서 ‘믿어지는 것’으로 바뀝니다. 증인은 보고, 듣고, 느낀 체험을 전하는 자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증인들의 유기적인 조직체며, 은혜가 각 개인을 통해서 나타나는 은사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은사를 나누는 기쁨이 있고, 눈물이 나오고, 기도가 되며, 전도가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신념의 교인인가, 아니면 신앙의 그리스도인인가!
이 시대는 성령시대입니다. 2000년 전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신 사건은 성령을 통해서 체험되며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오직 성령으로 붉게 물드는 가을을 소망해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