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5-18 10:05:50 ]
갇혀진 나의 평안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웃의 아픔’에 관심 가져야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는 늘 예기치 못한 일들로 넘쳐난다. 자연적인 재해이든 인간의 계획과 욕심이 만들어낸 사고든 간에, 예기치 못한 그것들은 우리의 삶에 균열을 내며 우리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매정함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했던 그 절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질문 앞에 다시금 우리를 세운다. 무고한 고난으로 사지를 헤매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숨 가빴을 시간들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의 눈물 속에서, 눈물도 호사라는 그 많은 사람의 한숨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던 것일까?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하나님마저 손을 놓은 듯한 이러한 불안과 혼란은 한편으로, 우리를 반성하게 만들며 우리가 왔던, 그리고 가려고 했던 길들을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버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듯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그들의 눈물과 한숨 속에 계셨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십자가의 그 하나님이 그와 같이 무고한,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의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안녕만을 간구하며, 우리가 얻은 평화 속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한다.
스스로의 세계를 끝없이 좁히며 ‘나’와 ‘나의 평안’만을 희망하며 ‘나’에게 다가올지 모르는 불행 때문에 불안해하며, ‘그’ 희망과 ‘그’ 불행 사이에서 우리가 추구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향해 그리도 열심이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떠오르는 것은, 유하의 시 한 편이다.
눈앞의 저 빛! / 찬란한 저 빛 / 그러나 / 저건 죽음이다. / 의심하라 / 모오든 광명을!
짧은 이 시는, 죽음으로 이끄는 빛에 대한 경계를 은유적으로 말한다. 그의 시에 나오는 자본주의와 물신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오징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밝혀진 집어등(集魚燈)과 그 빛을 따라 정신없이 따라 들어오는 맛있는(?) 오징어를 잘도 그려낸다.
그 오징어를 떠올리면, 우리가 가려던 길도 다시금 보인다. 오징어 같은 행복과 오징어 같은 불행 사이에서, 분주한 그 빛은 우리와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매혹적인 것이었는가! 그 매혹을 떨치는 것이 우리는 왜 그리 어려운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가! 밝고 화려한 것에 경도된 우리의 삶과 믿음은 ‘다른 이’를 보지 못하게 한다.
다른 이들의 고난을 보지 못하고, 그 고난의 의미에 동참하지 못하게 한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광명’은 하나님의 고난, 하나님의 그 마음의 반대편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의 고난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알지 못하며, 그 고난이 우리의 무심함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9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