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9-07 21:20:23 ]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릴 사랑하신 하나님
세월이 갈수록 그 분의 ‘심정’ 알 것 같아
교정이 학생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역시 학교는 학생들이 있어야 제맛이다. 교수들에게는 방학 동안의 적막함이 오히려 연구하기에 쾌적한 환경이고, 마치 외국 한적한 동네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래도 젊음과 희망이 꽉 찬 학교는 교단의 미래를 밝혀준다. 생활관에 자녀의 짐을 실어다 주는 길에 연락하거나, 연구실을 방문한 선후배 목회자들의 목소리에는 자녀에 대한 기대가 묻어난다.
교수생활 초기에는 형의 입장에서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학생 중에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도 있었지만, 학생신분을 벗어난 햇수보다 교수경력이 짧았던 탓인지 그래도 학생의 관점에서 행정을 하고 강의도 했었다. 당시는 그 관점이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춘 것이려니 생각했다. 이제는 어느덧 같이 수학했던 선후배 목회자들의 자녀가 재학하니 부모 입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가르치게 되면서 불현듯 관점이 바뀐 것을 깨달았다. 학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열정과 헌신으로 사역하던 친구들, 자녀 문제는 잊어버리고 아니 주님께 맡기고 목회 사역에 전념하던 선후배들의 삶 속에서 자녀는 이차적인 존재였다. 그렇게 목회에 전념하다 보니 장성한 자녀가 모교의 학생이 되고 자신은 갑자기 학부형이 된 것이다. 어떤 학과(學科) 같은 학년에는 나와 같이 공부하던 동기 목사 세 명의 아들들이 동시에 공부하기도 했다. 대를 이어 같은 대학, 같은 학년에 동시에 공부하는 그 자녀를 보면서 그때를 회상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항상 나에게 와 닿는다.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는 지인의 자녀를 보면, 그 부모의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이고, 교정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꽁지머리를 휘날리는 모습 속에서도 그 자녀에 대해 희망을 품고 기도하는 친구 목사의 모습이 보인다. 그 학생의 모습보다도 그 자녀를 사랑하고 후원하며, 등록금 마련하느라 수고했을 부모들을 생각하면 강의도 신중해진다.
청년 시절에는 예수님의 절규가 내 속에서 울려 퍼졌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청년 예수의 삶처럼 나도 그렇게 살 것이라고 결단했었다. 그분의 고난, 그분의 희생,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분의 삶이 나를 변화시켰고, 내 삶의 기초였고, 내 소명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장성한 자녀를 보고, 그 장성한 자녀의 학부모를 대하는 지금은 똑같은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감동을 받는다. 그 아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아버지, 그 아들의 고난과 희생과 죽음을 보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그 아들을 죽기까지 희생 제물로 드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 조금은 알 것 같다. 학부모들의 마음을 통해서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그 사랑이 내 풍성한 삶의 근간이 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위 글은 교회신문 <20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