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7-12 13:02:19 ]
예수 이후부터 ‘복음’은 언제나 핍박의 대상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신령한 가치 소유해야
지난 6월, 6.25전쟁과 관련한 기사들을 보던 중에 동북아연구소연구위원 강철환 씨(새터민)가 쓴 칼럼 한 편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남북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제안이었는데, “대다수 북한 주민이 ‘김씨 왕조’에 대해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선뜻 대한민국 쪽으로 마음을 돌릴 수 없는 것은 6.25전쟁 원흉을 남한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청년시절 북한에서 대북방송으로 ‘6.25전쟁 남침설’을 접한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멍했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남침’을 ‘불편한 진실’이라고 지칭하며 이 ‘불편한 진실’이 북한 주민에게 제대로 알려지면 “김씨 왕조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지요.
또 북한 주민에게 지독하게 주입한 왜곡된 역사교육을 바로잡을 방안으로 남한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그의 주장이 100% 옳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공감하기에 역사왜곡의 부작용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고 있는지를 실감합니다.
사실, 인간의 역사 속엔 ‘불편한 진실’이 늘 존재했고, 그것을 선포하며 부조리한 기존 세력에 도전하는 누군가를 매개체로 역사가 진보했습니다. 중세시대, 면죄부를 판매하여 부(富)를 늘렸던 당시 부패한 지배계층-사제 집단-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그 좋은 예가 되지요.
AD 1세기의 유대 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땅을 지배하던 절대적 진리는 “율법만이 구원의 통로이다”였습니다. 반면 그것에 도전하는 ‘불편한 진실’은 “예수의 은혜만이 인간을 구원한다”였지요. 그 도전자는 바로 바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통한 구원 주장은 그 땅에 외식과 거짓을 난무하게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수탈에 시달리던 식민지 유대 백성을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이 율법의 감옥에 가두어 질식하게 했고 그 덕에 자신들은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왜곡된 현실 속에서 분명한 진실, 즉 “율법은 지옥 갈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팔자를 바꿀 힘이 없고 예수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생명줄이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외쳤고 기존 질서에 과감히 도전했습니다. 당연히 바울은 당시 지배 계층에게 위험 인물이었으며 죽여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바울의 ‘복음 전파’ 위력을 그들도 인정했다는 것이며, 복음이 지닌 강력한 울림이 그들의 양심에 찔림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결국 당시 유대 땅 기득권 세력의 불의함과 악함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덮으려 했던 ‘불편한 진실’은 순교의 피를 통해 파도처럼 퍼져 나갔고 오늘의 기독교를 세웠습니다.
21세기에도 복음은 여전히 ‘불편한 진실’입니다. 이 시대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물질 만능주의’와 ‘세속주의’에 도전하여 처절한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철역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다소 과감한 외침을 들으면 안 믿는 사람들은 분노하기까지 하지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뒤집어 보면 그 소리가 자신들의 두려움-죽음에 대한-의 뿌리를 자극함을 입증한다고 여겨집니다.
소금의 가치가 ‘짠맛’이듯 기독교인의 가치는 안 믿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불편한 진실’의 전파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말씀의 울림으로 세상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북한이라는 한 나라에 6.25전쟁이 남침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바로 전하는 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면, 인류를 구원하는 대역사에는 더욱 거대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양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의 진행에는 인간이 있다면 후자의 선두에는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 구원의 사명을 띤 ‘예수의 사람들’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4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