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12-31 10:18:27 ]
하나님의 대역사를 창출하는 거룩한 도구로 사용될 것인가
이성적 판단으로 주님의 일을 거스르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고3 아들의 아침을 챙겨 주려고 새벽에 눈을 뜨며 필자가 가장 먼저 찾는 것은 안경입니다. 피곤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는 눈꺼풀에 힘을 주는 것은 시력 낮은 눈에 선명한 세상을 열어 주는 안경이고, 그때야 비로소 잠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요. 나이 들면 근시와 노안이 오기 마련인데 안경이 없던 시절에는 대체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해집니다.
그러한 시절의 불편을 해결한 사람이 바로 영국 수도사 겸 과학자 로저 베이컨이지요. 그가 1268년에 발명한 루페(돋보기)가 안경의 시초였다고 합니다. 2013년, 뉴욕 타임스는 삶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성과를 ‘이정표’라 칭하며 세계 100대 ‘이정표’ 중 첫째 자리에 루페를 선정했습니다. 비록 베이컨은 자신의 발명품이 후손의 삶에 그런 거대한 발자취를 남길지 상상도 못 했겠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의도치 않게 한 선한 행동의 결과가 인간 삶의 각 영역에서 분수령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세계도 마찬가지지요. 성탄절에 각 교회 성극에서 빠짐없이 등장했던 동방박사가 그 한 예에 해당합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좇아 중동 한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왔고 그들이 아기 예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다는 것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땅으로 돌아간 과정에 관해 관심 갖는 경우는 별로 없는 듯합니다. 그들은 꿈에서,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고 ‘다른 길’로 귀향했습니다(마2:12).
1세기 중동지역에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온 먼 길, 그 여행길에는 늘 죽음의 위협이 도사렸습니다. 그들이 지나야 하는 사막은 온갖 괴물과 귀신이 가득하다고 소문날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그래도 ‘온 길’은 무역 상인이 닦아 놓은(예루살렘과 동방을 연결하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귀향한 ‘다른 길’은, 무역로가 개발되지 않은 당시에, 거리와 위험이 ‘온 길’에 비해 훨씬 증가했으리라 짐작됩니다. 헤롯에게 예수의 거처를 알려서 보상도 받고 온 길로 안전하게 귀향하는 것이 그들에겐 이익이었고 합리적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합리한 선택을 했고, 그 결과 예수의 가족은 이집트로 피신해 거처를 마련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의 헌물을 바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는 헌신이 있었기에 2000년이 지난 지금, 동방박사는 이방에서 온 첫 그리스도인이라는 칭송까지 받나 봅니다. 그들은 예상도 못했지만, 그 순종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서막을 여는 초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보았던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의 한 시나리오작가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작가였던 그의 방 안엔 그동안의 치적을 대변하는 상패와 작품이 가득했지요. 그러나 그는 질문합니다. “백 살이 된 내게 저 수많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이 땅의 썩어질 것만으로 채워진 그의 100년 인생은 그가 가야 할 죽음의 길엔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고백이겠지요.
그의 고백이 내 것이 되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됩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예배를 드려오며 헌물 내는 것만으로 믿는 자로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자족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내 영혼의 방엔 기독교인의 명분 지키기에 급급한 공허한 헌물 리스트만 쌓여 있는 것은 아닌지, 동방박사처럼 하나님의 대역사를 창출하는 거룩한 도구로 사용될 기회를, 나의 합리적 판단 때문에 번번이 놓쳐 온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그 결과, 행동의 헌신으로 나가지 못한 박제된 기독교인으로 나의 마지막 시간에 서게 되는 것은 아닐지….
2014년 새해는 올해보다 더욱 어수선해지리라고 야단입니다. 불황은 깊어지고 북쪽 땅의 소식은 어수선함의 반경을 더하고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적 합리성의 무게에 짓눌리는 영혼의 눈꺼풀에 힘을 보태 줄 영적 안경을 쓰기로 작정해 봅니다. 그것으로 만나는 세계는 합리적 평가에 의한 세상의 ‘이정표’와는 다르겠지요. 아마 불편함과 손해로 벽을 짜 올린, 통과하기 버거운 삶일 겁니다.
그러나 이 어설픈 백성에게 무기로 주신 눈물의 기도를 붙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신령한 시간표의 한 모퉁이에서 제 몫을 하는 철든 백성으로 서 있지 않을까요? 영원한 세상의 ‘이정표’로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니, 새해를 맞는 마음이 왠지 든든해집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윤은미 집사
방송작가
서울 장신대 ‘글쓰기와 논술’ 출강
위 글은 교회신문 <36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