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7-03-06 13:00:36 ]
대학원 시절 폐 중등증 걸려 절망스러웠지만 겸손함 배우게 돼
절망의 순간은 과정일 뿐, 오히려 하나님 만날 기회이기도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만찬 중일 때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일을 끝내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드디어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한 군데 모아 놓고 제자들에게 ‘비밀’을 풀어놓으십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가는데 주님이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닦으십니다. 얼떨결에 제자들은 그냥 멍청히 발을 내놓습니다. 베드로에게로 오십니다. “이제 네 발을 내밀어라”(요13:3~11).
베드로는 말합니다. “안 됩니다, 주님! 제 발을 씻으시다니요!” 이때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13:7). 여기 ‘이제는’은 ‘바로 지금’이란 뜻입니다. ‘네가 서 있는 지금 위치, 네 형편, 네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후에는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자기 일생을 이끌고 그의 사고와 행동을 주장해 가는 성경 한 구절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자신을 변하게 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합니다.
저도 어렵거나 당황할 때마다 기억하고 의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바로 이 구절입니다. 제게 학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신앙의 고상함을 보여 주신 한국 신학계 거장이자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이던 김정준 박사님이 제게 심어 주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다닐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하던 중 오한과 기침이 심하고 땀이 물 흐르듯 했습니다. 대학병원에 진찰받으러 갔더니 의사는 엑스레이를 보고 절망적 진단을 내렸습니다. 폐에 구멍이 뚫린 ‘중등증(Advanced cavity)’이라고 했습니다. 당장 입원해 1년간 요양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휴학 원서를 내고 인사차 대학원장실로 김 박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저는 그분의 조교로 일했습니다. 내 사정을 들으신 박사님은 자신도 그 병으로 마산결핵요양소에서 ‘죽다가 살아났다’ 하시면서 “최군! 남보다 1년 늦어진다고 아쉬워하지 마라” 하시고 친히 성경을 펼쳐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현재 상황을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이야. 아마도 훗날에는 하나님 뜻을 알게 되고 오히려 유익한 시간이고, 감사한 사건이라고 기억하게 될 걸세.”
그 후 저는 마산결핵요양소로 갔습니다. 그분의 권고와 위로는 참으로 옳았습니다. 지면상 오늘은 두 가지만 생각해 봅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당장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는 정말 뜻밖의 좋은 일이 확 열리기도 하고, 어느 때는 고독에 처하고 상식에 맞지 않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꿈꾸는 사람 요셉은 뜻밖에도 형들의 손에 깊은 웅덩이에 처박히고, 노예 상인의 매물이 되어 이리저리 팔려 다닙니다. 의롭게 살려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비극과 억울함이 겹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당시 파라오의 최측근이나 대단한 권력층들이 수감돼 있어 날마다 감옥에서 이집트의 역사, 정치와 왕궁의 법도를 실제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오자 총리가 돼 훌륭한 정치력을 발휘합니다. 전혀 알 수 없던 상황이 결국 요셉을 당시 최고 강대국인 이집트 총리가 되게 했고, 자기 동족을 살리는 엄청난 사명을 이루게 합니다.
욥도 한꺼번에 몰아닥친 인생 최악의 비극과 고통 속에 절규합니다(욥3장).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의 태어난 날이 저주스럽습니다.” 하지만 후에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성숙한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욥42:5). “내가 이 비극의 아픈 터널을 지나기 전에는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고통을 지난 지금은 내가 내 눈으로 주님을 뵈옵나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위기를 값진 교훈으로 삼아 극복하고 승리해야 합니다. 고난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상황은 일차로 하나의 사건이지 저주도 불행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축복의 길로 통할 수도 있고, 저주의 길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과정은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의 결론은 지금이 아닙니다. 어느 것은 하늘나라에 가서 확인될 것도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중 생활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칠 때 그것을 실패하는 길이요, 낙오자 신세로 느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내몰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지도자로 훈련해 위대한 인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뛰어갈 때, 어느 시점에서는 절망적 웅덩이에 빠지고 억울한 누명을 써 감옥 같은 답답함에 처박힐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그 순간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아파하는 자리, 처절한 실패가 있는 과정, 가장 깊은 고독의 순간이 바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요, 오히려 비약할 기회가 됩니다.
저는 폐병 탓에 처절한 절망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저는 없습니다. 여전히 교만하고 나태하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허약한 인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자리, 아픔의 현실, 억울하고 답답한 오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을 결국 좋은 길로, 더 확실한 장소로, 기쁨의 승리를 맛보는 순간으로, ‘그래서 그랬군요’ 하는 승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군요.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최종진 교수
前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前 한국기독교학회장
위 글은 교회신문 <51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