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참된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

등록날짜 [ 2017-06-12 15:02:31 ]

구약의 율법은 죄인임을 확인할 뿐 죄를 해결하지 못해
불교도 자력 구원 말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어
제단 위의 어린양처럼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만 나를 구원할 수 있어

인간은 죄를 지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노력해서 스스로 죄에서 자유하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종교에 의지합니다. 인간 스스로 노력해 자유를 얻으려는 대표적인 자력(自力) 종교가 구약 율법 종교와 불교입니다.

구약 율법 종교와 사성제의 한계
구약 율법 종교는 완전히 자력 종교입니다. 구약 종교인 율법을 두 마디로 요약하면 ①수직 표준인 ‘하나님을 사랑하라’ ②수평 표준인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모든 계명이 ‘너는’이라고 명시돼 인간 스스로 행해야 합니다.

인간은 “네 힘으로 네가 해 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완전히 실패하고 끝장납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발견하는 데서 끝나기에, 온 인류가 ‘죄인’이라는 확인만 할 뿐입니다. 따라서 구약 종교인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으려면 메시야가 오셔야 하고,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 구세주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불교 사성제(四聖諦, 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도 자력 종교로서 구원의 방법으로 자기 수행을 제시합니다. 사성제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의 고통에서 시작합니다.

어느 유명한 스님은 고행(苦行)과 수도(修道)라는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8년 동안 한 번도 누워서 자 본 적이 없고, 누더기 한 벌만 입은 채 16년 동안 솔잎과 생쌀로 연명했다고 합니다. 또 10년간 철조망으로 암자를 둘러싸고 혼자 고행하고, 새벽마다 부처에게 백팔배(百八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엄청난 노력에도 구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시(詩) 한 편만 유언처럼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토록 나는 남녀 무리의 사람들을 속여 왔고/ 그래서 나 지은 죄가 하늘보다 높고 수미산보다도 더 높도다/ 산 채로 지옥으로 떨어지니 그 한이 천 갈래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자락에 걸렸구나”

그렇습니다. 그는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님처럼 살고 고통당해야 구원을 얻는다면 저는 절대로 구원을 못 얻을 것 같습니다. 과연 사람으로 태어나 그런 고행을 감당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 스님을 30분만 만났으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길을 전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분도 예수님을 만났다면 자기 깨달음을 뛰어넘는 시(詩)로 생을 마무리했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 최고의 철학이고 인간론의 절정이라 보는 불교는 사실 하나님도, 구세주도 없고 단순히 가르침만 있는 무신론입니다.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것이라 하지만 인간 스스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해답, 하나님 은혜
기독교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질문에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구원은 내가 노력하거나 무엇을 이뤄서 얻는 것이 아니요, 받을 자격 없는 죄 많은 인류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구약 종교가 불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인간의 죄 문제를 깊이 인지하고 동물 제사로 속죄받는 길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마저 미완성인 예언적 성격에 머무릅니다. 메시야가 와서 구원을 이룰 것을 상징할 뿐입니다.

죄를 지은 자가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을 끌고 와서 머리에 안수해 자기 죄를 제물에 다 뒤집어씌워 전가(轉嫁)합니다. 흠 없고 티 없는 무죄한 어린 양은 사람의 죄를 전부 넘겨받아 결국 죗값인 죽임을 당하는데, 제단 북쪽에서 양을 죽여 피를 양동이에 받고 각을 뜨고 물로 씻어 제물을 만들어 제사장에게 넘깁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에 붓고, 뿌리고, 제단에서 제물을 완전히 태워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립니다. 그 죄인은 죄에서 용서받고 자유를 얻습니다. 이 구약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을 예표(豫表)합니다(롬3:21~22).


주님이 받으신 고난과 그 의미
겟세마네 기도터는 양에게 죄를 전가하는 제단 앞 사건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인류의 무서운 죄, 바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전부 옮겨 받으시고 무서운 죄의 무게를 느끼셨습니다. 얼마나 그 상황이 처절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2,44).

땀과 눈물과 핏방울로 범벅 된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죄악의 무게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줍니다. 우리 인류의 죄를 넘겨받으신 주님은 그때부터 죄인 취급을 받습니다. 때를 맞추어 가룟 유다가 체포 병력을 이끌고 옵니다. 포승줄에 묶이고 채찍에 맞고 더러운 욕을 먹고 재판을 받습니다.

어린양이 죄를 뒤집어쓰고 처절하게 죽어 인간의 죗값을 치르는 것처럼,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전가받은 주님도 죄의 형벌과 죗값인 사망을 담당하시려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는 제물로서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속죄와 대속의 제물로 모든 심판을 홀로 받으시는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위에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죄를 담당하신 아들에게 향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버림받아 우리가 속죄를 얻었고, 고난을 당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얻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롬5:8).

하나님과 죄로 원수 된 사랑받을 만한 가치 없는 쓰레기 같은 나를 살리시고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독생자를 죽여서라도 구원할 만한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최종진 교수
前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前 한국기독교학회장



 

위 글은 교회신문 <53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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