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슬픔과 고통의 끝자락을 지나면

등록날짜 [ 2019-06-17 13:43:12 ]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유람선 사고로 부모와 자녀를 잃고 울부짖는 분들의 아픔을 보았습니다. 남편을 잃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뿜는 고통스러운 절규를 들으며 얼마나 힘들어하실까 함께 마음 졸이며 눈물을 나누고 있습니다. ‘가족을 떠나보내고 남은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고통은 하나님의 실수인가? 고난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이 깊어지면서 문득 튀어나오는 질문들은 욥의 시대 이후 줄곧 인류를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인생에서 가장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끝자락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일본 어느 연구소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조사했는데 전부 죽음에 얽힌 사연이었습니다. 배우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아픔이 2년 정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1년 정도 간다고 합니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느끼는 가장 심한 고통은 자식을 먼저 보내고 숨죽여 흐느끼는 아버지의 시리도록 아픈 마음입니다. 부모 상고(喪故)에는 먼 산이 안 보이더니, 자식이 죽으니 앞뒤가 다 안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평생 그 아픔을 마음에 묻고 살아갑니다.

욥의 고난에서 배우는 인생의 진리
구약성서의 욥이 살던 당시에는 고통받는 이유는 그의 죄 때문이라는 ‘인과응보’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인류사를 지배해 온 분명한 원리입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경험론적 입장에서, 빌닷은 전통주의적 입장에서, 소발은 교리주의자 입장에서 욥의 고통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며 욥을 잔인하게 공격합니다. 욥기서는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전통교리의 일방적 견해를 인정하면서도 여기에 반기를 들고 항거하며 새로운 고민에서 그 이상의 것을 찾습니다. 욥기는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흠잡을 데 없는 의인(義人) 욥에게도 온 인류가 당할 모든 슬픔과 고통이 갑작스레 닥칩니다. 동방 최고 갑부의 재산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자녀 10명이 사고로 한꺼번에 죽는 아픔이 닥치고, 창질(瘡疾)에 걸려 기왓장으로 가려운 부위를 긁적거리는 신체적 질병이 괴롭힙니다. 또 친구들의 잔인한 공격과 부인이 저주하며 떠나 버리는 사랑의 아픔을 겪습니다.

가장 아픈 대목은 괴로워 부르짖는데도 전혀 응답이 없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욥기 30장 20~23절을 보면 욥이 절규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 내게 너무 잔인하십니다. 힘이 세신 주님께서 힘이 없는 나를 핍박하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보잘것없는 이 몸을 하나님이 어찌하여 그렇게 세게 치십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고난이 있습니다. 영국 작가 C.S. 루이스(1893~1963)는 9세에 어머니가 폐암으로 죽었고, 58세에 결혼한 지 4년 만에 아내가 암으로 죽습니다. 아내가 죽은 후 루이스는 지옥으로 곤두박질칠 정도로 방황합니다. 내가 풍요로울 때 나타나시던 분이 곤경에 빠지자 침묵만 하신다고 원망합니다. 루이스는 자기 신앙의 밧줄이 튼튼하리라 믿었는데, 고난이 발생하자 자기 믿음이 허술한 지푸라기처럼 허약함을 깨닫습니다. 얼마 후 그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 이유를 깨닫습니다. ‘얘야, 잠자코 있거라.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욥에게도 하나님은 이런 대답을 하십니다(욥38:1~41:34). “네가 몰라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구나. 내가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할 때 너 거기 있었느냐. 죽은 자가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본 일이 있느냐.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동풍이 불어오는 그 시작점에 가 본 적이 있느냐. 네가 세상의 광활한 이치와 오묘한 것을 다 알면 한번 말해 보겠니”(욥40:1~2).

하나님의 물음에 “아니요”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욥은 하나님의 섭리 중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편, 고통이 상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고난 끝에는 영원한 행복의 천국 있어
성도가 겪는 시련과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훈련의 의미와 더불어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욥이 이해하기 어려운 악몽 같은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고 난 다음 외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42:5~6). 의인의 고통은 하나님을 친히 체험하고 더욱 깊은 영적 친교를 가져옵니다.

고통과 죽음의 아픔을 겪고 있다면 우리에게 천국의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자의 배신, 유대인의 핏발 서린 핍박을 받으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서원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셨고”(히5:7), 마지막 십자가에서 인류의 죗값을 해결하기 위해 처절하게 “내가 목마르다”(요19:28)고 지옥의 고통으로 절규하시며 운명하시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슬픔과 고통의 끝자락을 지나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천국이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친히 성도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계21:3~4)고 약속된 곳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인생의 결론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고통과 죽음을 비롯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지나가는 곳입니다.





/최종진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한국기독교학회장


위 글은 교회신문 <62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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