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예수와 함께하는 새해, 새 시간

등록날짜 [ 2021-03-04 10:48:01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군대에

이끌려 출애굽 한 날을
‘새해’로 정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구원받아
‘새 시간’을 허락받았다
새해가 희망인 것은

이 때문이지 않은가


새해가 되고 양력·음력 설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는 때가 된 것 같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시간에 대한 이해를 돌아보게 된다. ‘새해’라는 것, ‘새로운 시간’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물리적 시간의 변화가 시간의 새로움을 담보하는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을 달의 움직임으로 이해한 것이 음력이고, 태양의 움직임으로 이해한 것이 양력이다. 태양의 움직임은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의 변화를 통해 하루라는 너무 짧은 기간과 일 년이라는 너무 긴 기간만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반영하는 시간을 정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반면에 모양의 변화를 확연히 볼 수 있는 달은, 삶의 시간을 결정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일정하게 변하는 달의 변화에 따라 일상의 주기를 적절하게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음력은 문명 이전인 석기시대부터 사용되었고, 태양력은 기원전 6000여 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후 태양력의 역사는 로마제국과 중세를 거치면서 혼란스럽게 진행되고 다듬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달과 태양의 움직임은 우리들의 시간과 삶을 규제하며, 삶의 다양한 양식에 영향을 주었다.


고대 이스라엘은 시간에 대해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한 날을 기점으로 한 해의 처음을 정하게 했다(출12:1~2). 아홉 가지 재앙에도 여전히 강퍅함을 보인 바로에게,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바로의 장자부터 옥에 갇힌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치는 밤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족대로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했다.


이집트 백성의 곡소리가 넘쳐 나던 밤, 이스라엘 백성은 안전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첫 유월절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시작됐다. 여호와의 군대가 그들을 이끌었다. 그 밤은 ‘여호와의 밤’(출12:42)이었다. 여호와의 밤은, 여호와 하나님이 밤새 깨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여호와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여호와의 밤을 보내고, 하나님께서는 그 달을 한 해의 첫 달로 명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움직임에 따라 새로운 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후 오랜 역사의 굴곡 속에서 이스라엘의 시간도 태양력과 태음력을 오가며 쌓여 갔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 밤을 기억하며 새해 첫 시간을 출발했다.


여호와의 밤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군대에 이끌리어 구원을 경험한 시간이다. 그 시간을 기점으로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것은 앞으로도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결단이며 하나님께서 시간의 주인이요, 역사의 왕이라는 고백이다. 우리의 시간은 태양이나 달에 있지 않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새롭게 되었고,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군대와 함께한다. 여호와의 군대와 더불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와 함께 삶의 파고를 넘는다. 새해가 희망인 것은 이 때문이지 않은가!


음력 명절을 지내고 보니 이제 곧 사순절이 시작된다. 여호와의 군대에 이끌려 하나님의 새로운 시간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시간은 이제 사순절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꿈꾼다. 코로나로 인한 두려움과 그것이 만들어 낸 절망적 상황이 우리를 위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시간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삶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 여호와의 밤에 그랬던 것처럼, 주의 군대가 우리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호경 교수

서울장신대 신학과




위 글은 교회신문 <6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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