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7-21 19:07:41 ]
비바람 무더위 어떠한 고난도
견뎌 내는 식물의 강인함 보며
생명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 믿고 고난 견뎌야
생명의 길 갈 수 있음 깨달아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 중 나에게 일어난 가장 특별하고 긍정적인 변화는 ‘산책’이다. 우리 집 바로 옆에는 ‘푸른수목원’이 있다. 지역주민에게 매우 사랑받는 곳이다. 계절에 맞춰 예쁜 꽃과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그 덕에 산책하는 즐거움을 배우며 말할 수 없는 삶의 활력을 얻는다.
지난해 여름, 가볍게 나갔던 산책길에서 억수 같은 비를 만났다. 멀리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하는 엄청난 비였다. 잔뜩 젖은 몸을 바삐 움직이면서 비로부터 도망치고 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꼼짝없이 비를 맞고 있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이 땅에 묶여 있는 나무와 꽃이었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동물은 어디든 움직일 수 있지만, 식물은 그렇지 못하다는 새로울 것 없는 진리가 이상하게 마음을 ‘쿵’ 하고 강타했다. 도망갈 수 없는 식물은 고스란히 비를 맞고 천둥과 번개를 견뎌야 한다니….
다음 날, 산책길에서 그 나무들과 꽃을 보았을 때, 다시 한번 마음이 ‘쿵’ 했다. ‘살아 있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그 비를 맞고 어떻게 살았지? 내가 어제 식물처럼 내내 서서 밤새도록 그 무서운 비를 맞았더라면, 오늘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후로 나의 식물예찬은 시작되었다. 움직이지 못한 채, 모든 불가항력적인 변화를 묵묵히 견뎌 내며 생명을 유지하는 식물은, 피하고 도망가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동물보다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식물 상태란 말을 죽음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고, 어떤 대상이 움직이지 못하고 무기력하면 ‘식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해 죽은 것 같고, 스스로를 방어할 어떤 장비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듯하나 식물은 살아남는다. 오랜 시간 버텨 온 나무가 쓰러지기도 하고 가냘픈 줄기가 꺾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햇볕이 내리쬐고 언 땅이 녹은 뒤에, 식물은 각자의 방법으로 마른 목을 축이고 언 몸을 녹이며 젖은 몸에서 생명을 내뿜는다.
식물의 생명력은 “땅은 식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킨다. 뭍이 드러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 땅에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고 명하셨다(창1:11). 6일간의 창조 이야기를 두 부분으로 나누면, 첫 3일간은 공간 창조(빛과 어둠, 궁창과 하늘, 땅과 식물)에 해당하고, 나머지 3일간은 그 공간 안에 있는 것들의 창조(해와 달과 별,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땅의 생물과 인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대비라면, 식물은 세상을 구성하는 근간이며 근본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 식물의 생명으로 구획된 공간 안에서, 온갖 생명을 가진 것들이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어서 무력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고 생명을 내뿜는 힘, 그것이 식물이다! 셋째 날, 하나님이 땅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고, 또한 땅이 식물을 내자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매일, 식물이 구획해 준 생명의 공간을 걸으면서 어떤 고난도 피하지 않고 견디는 식물의 묵묵함과 강인함을 돌아본다. 그리고 이 혼란의 시대에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한다. 우리가 발전시킨 현란한 문명과 기술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한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으며 요리조리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 나갈 때, 생명이 일어난다. 식물처럼…!
코로나19는, 너무 빨리 움직이며 너무 많은 것을 바라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코로나19가 억지로 멈추게 한 발걸음을 통해서, 이제는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가늠해 보았으면 좋겠다. 생명의 길은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깨닫고 식물적 인내로 삶을 지켜 낼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김호경 교수
서울장신대 신학과
위 글은 교회신문 <70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