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2-11-10 13:49:02 ]
많은 사랑 쏟아 부은 고린도교회에
예수 안에서 평안 누리길 축복하며
교회의 문제들 해결할 처방을 전해
고린도전서 강해①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편지라 하면 ‘손편지’밖에 없었으나, 요즘은 이메일을 비롯해 문자메시지, 카톡, 라인 등 그 종류가 많아졌습니다. 편지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글을 보낸 이의 심정을 받는 이가 이해하지 못할 때 그 편지는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무가치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매일 아침과 오후에 담임목사님의 문자(편지)를 받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노심초사 염려하며 쓴 담임목사의 심정을 알고 글을 읽는다면 ‘아! 담임목사님이 당부하는 것이 이것이고, 걱정하는 것이 이것이구나!’라고 깨달아 담임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경험합니다. 반면 우리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그 문자를 보면 ‘이 목사님은 참 열심이시네, 성도를 참 사랑하시나 보네’ 정도로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와 사랑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인 것을 인정하고 읽는다면 그냥 문자적으로 읽을 때에 비해 깨닫는 바가 천지 차이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낳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많은 서신서를 썼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읽을 때도 그 교회와 바울이 어떤 관계인지, 또 편지를 쓴 배경이 어떤지를 알고 읽어야 편지에 담긴 바울의 심정과 편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후서 외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편지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전하면서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고 교회에 닥친 문제를 처방하는 등 관심을 쏟았습니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계속 다녔으나 1년 6개월 동안 한곳에 오래 머물면서 말씀을 전한 곳도 고린도교회가 유일합니다. 그만큼 바울이 많은 사랑을 쏟아부은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바울과 고린도교회가 어떤 사이인지 잘 나타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올 때는 아덴에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혼자 왔는데, 유대인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천막 치는 일을 같이 하면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왔을 때 비로소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감당하지 못할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요청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약속하신 ‘유대인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것도 죄인 중의 죄인을 참혹하게 죽이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일이기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면 예루살렘의 수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범법자가 되기에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니까 유대인들이 얼마나 바울을 대적하고 핍박했던지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을 위로하면서 용기를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행18:9~10).
그러나 유대인들이 호시탐탐 바울을 죽일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갈리오라는 새 총독이 오자마자 바울을 데리고 가서 고발합니다. 갈리오가 “이는 로마법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니 너희끼리 해결하라”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분풀이로 예수 믿는 회당장 소스데네를 데려다가 때립니다.
바울이 편지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고전1:1)라고 인사했을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 장면을 다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겁박 가운데서도 소스데네와 함께 고린도교회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 기억하지?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지?” 이렇게 상기시키면서 편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편지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고, 고린도교인들은 성도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부르지 않으면 하나님께 올 자가 없으니,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어 성도로 부르심을 입고 더 나아가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고전1:2)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를 알고,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우리를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에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 은혜를 알아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맞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설명한 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3)라고 말합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죄와 저주와 사망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 악한 마귀 궤계와 죄에서 분리되어 주님과 함께 누리는 평안입니다. 죄와 지옥에서 분리된 구원의 은혜, 또 나를 천국까지 인도하시면서 이 땅에서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 주시는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 뒤에 다시 인사하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4)라고 합니다. 감사한 것은 바울이 애타게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말과 지식이 고린도교회에 풍족하고, 그래서 믿음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있고, 그들이 모든 은사에 부족함 없이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주님 오실 날을 기다렸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첫 인사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이 구원의 은혜와 죄와 저주와 사망과 악한 마귀 궤계를 이기는 평강을 누리고 있고,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고,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견고한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른다. 너희들은 끝까지 이 믿음 잃으면 안 되고 이런 믿음 주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리자.” 이러한 바울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인사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런 인사를 받을 만한 상황인가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77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