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장애라는 심리가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에서 제시해 주는 몇 가지 경로도 결정하지 못하거나, 식당 메뉴를 고르는데도 한참을 고심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갈등이 심한데, 여러 사람이 모이면 어떻겠습니까. 인류 역사만 보더라도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런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인 복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부터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복음과 상관없이 다른 것 때문에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나는 바울에게 복음을 배웠다”, “나는 아볼로에게 배웠다”, “나는 게바에게 배웠다”, “나는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며 복음을 들은 출처를 근거로 거기에 속했다고 주장하면서 서로를 판단하고 비방한 것입니다. 이에 속이 상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라고 말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침례에 관한 사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침례받은 기준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이 침례 때문에 너희들에게 분란이 있는 것을 볼 때 내가 침례를 몇 명에게만 주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또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내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고전1:13)라며 속상해서 말합니다. 이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만 바라보아야 하고, 침례받을 때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는데 본질을 벗어나 사람들의 관계나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교회에 머물면서 마음을 다 쏟아가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이 하나님 말씀이 본질이 아니라, ‘누구한테 배웠느냐, 누구한테 침례를 받았느냐’라는 것에 따라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좇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 바울이 답답해서 17절에 “너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침례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며 “내가 철학이나 사람의 이론을 가지고 너희를 설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지고 전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려고 오직 복음을 전한 것”이라고 복음에 대해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가 다른 서신서와 가장 큰 차이점은 인사말에서 나타납니다. 다른 서신서는 한두 절로 인사를 마치지만 고린도전서에는 아홉 절에 걸쳐서 인사말을 합니다. 이때 ‘그리스도’라는 말이 9회, ‘예수 그리스도’는 8회 나옵니다. “너희들이 그리스도 예수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분쟁한다는데 제발 그리스도 예수만 붙잡아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중심”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입니다.
고린도교회처럼 우리 가운데 분쟁이 없어지려면 복음에 확실하게 젖어야 합니다.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먼저 복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마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 1장 1~4절에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원리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 ‘그리스도’라는 말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주를 보내겠다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보내기로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이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준 약속도 이루어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라고 물어본다면 하나님이 구약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셨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약속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구약의 말씀 없이 예수께서 갑자기 나타나 능력을 행하며 “나는 너희를 죄에서 구원하러 왔다”고 한다면, 거짓 그리스도와 참 그리스도를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성경에는 마지막 때에 이적과 능력을 보여주는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 땅에 오신 분, 선지자가 예언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구원의 스케줄이면서 이 땅에서 살다가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실존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1:3). 다윗의 혈통, 요셉의 아들로서 진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말할 때 ‘예수’라고 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성결의 영’은 다시 말해 거룩한 영인데, 거룩은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부활을 통해 거룩하심을 확증하셨고,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의 죄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갚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물로서 죽으시고 부활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해야 예수 이름으로 사함을 받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중략)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만 나타날 때 우리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77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