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등록날짜 [ 2024-04-11 17:19:30 ]

내 육신의 사정을 뒤로한 채

복음 전하는 일을 최우선하고

핍박을 받으며 주를 좇는다면

분명한 영생 있다고 약속하셔


마가복음 강해(27)

한 사람이 예수께 달려와 무릎 꿇고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막10:17). 마가복음에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이 사람은 부자 청년이며(마19:22), 관원(눅18:18)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재물이 많고 지위가 상당히 높았는데도 방탕에 젖지 않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종교적 열심이 있었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에 예수께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자기가 모든 계명을 지켰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실 만큼(막10:21) 경건한 자로서 율법을 잘 지킨 것입니다. 이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10:21~22). 그러자 부자 청년은 이 말씀을 인하여 근심하며 돌아감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영생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졌다면, 육신의 때가 내 영혼의 때를 위한 수단이자 기회임을 알아 영혼의 때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온전한 영생을 모르고 그저 육신의 때가 중요하기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니까 근심하며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영생은 이 땅에서 부유하게 천년만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 받아 천국에 가는 것, 즉 죄짓게 하는 마귀 궤계를 멸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에 마귀에게서 벗어나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목적도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심이었으나,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예수를 통해 영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죄와 마귀 궤계의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고난받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분명한 이유이며, 그 사랑 앞에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얽매여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면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았다”, “영생에 소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청년과 똑같습니다. 육신의 정욕에 얽매이고 세상에 소망을 두면 영생도, 하나님의 축복도 오해하여 이 청년처럼 주님을 좇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만 좇아 확실한 영생 소유하길

예수님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당부하신 말씀은 단순한 박애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보면서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율법의 정신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율법의 정신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불쌍한 사람들을 방치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의 근본정신에 따라 율법을 준수한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지킨 것입니다. 그토록 하나님 말씀을 잘 따른다고 자부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심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율법의 정신이 아니라 자기 육신의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재물이 많은 이유로 부자 청년이 떠나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막10:24~25). 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여겼기에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심히 놀라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막10:27). 하나님은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수 있게 하시고 그들도 구원받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분명히 알지 못하고 그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 앞에 이 땅에서 영광을 얻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 버렸다며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니까 예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죄 사함의 복음,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저주와 지옥에서 구원하시려 아들을 십자가의 대속물로서 잔인하게 죽인 사실을 널리 전해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좇으려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천국 가지 못하게 하는 내 육신의 모든 사정보다 복음을 최우선하고 더 나아가 핍박을 겸하여 받으며 주님을 좇는다면 분명한 영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있으면 버리고, 핍박이 올지라도 견디며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내 생애에 이루어지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고 천국까지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영혼 구원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히10:3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입술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전히 사용되어 주님을 좇아갈 수 있는, 그래서 영생이 확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84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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