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등록날짜 [ 2024-05-02 14:54:51 ]

소경 바디매오는 자신이 예수 앞에

얼마나 불쌍한 자인지를 고백했고

겉옷 버리며 믿음을 확실히 표현해

주가 원하시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마가복음 강해(29)

예수께서 예루살렘 북동쪽에 있는 여리고에 이릅예수께서 예루살렘 북동쪽에 있는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여리고에는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은 바디매오의 귀에 예수께서 지나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길가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막10:47).


바디매오는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라고 꾸짖어 만류해도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부르며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바디매오는 사람들이 제지해도 개의치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겨냥해 부르짖었습니다. 지금이 눈을 뜰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급히 올라가는 길이었고, 그 길은 참혹한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위해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디매오의 절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여리고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예수님 곁에는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예수님의 관심을 끈 사람은 바디매오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자리 차지하려는 욕망으로 가득했습니다. 허다한 무리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받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랐기에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디매오만 그리스도를 예언한 다윗의 후손이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9:6~7, 렘23:5).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구약에서 하나님이 보내기로 약속하신 그리스도’라고 정확하게 알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압니다. 나는 예수님이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불쌍한 자입니다”라며 주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도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며 주님께 나오자 예수께서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막9:21~27). 우리도 주님 앞에 나의 불쌍한 모습을 들고 와야 합니다. 먼저는 지옥 갈 내 불쌍한 모습을, 또 이 땅에서 해결하지 못할 수많은 고통을 들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라고 일러 주자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갔습니다(막10:49~50). 당시 소경이 입던 겉옷은 소경이라는 처지를 알려 주는 일종의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 옷을 입고 있어야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노천에서 생활하는 거지에게 겉옷은 없으면 안 될 필수품입니다. 겉옷이 없으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밤에 치명적인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겉옷을 내어 버렸을까요? ‘예수께서 나를 분명히 고쳐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확실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 같은 확실한 믿음의 표현을 보여 준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도 예수께서 고쳐 주실 것을 분명하게 믿어 지붕을 뚫어서라도 중풍병자의 침상을 예수께 내려놓았습니다(막2:1~12). 또 혈루증 앓던 여인도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다고 믿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막5:25~34).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의 불쌍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묻자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을 원해야 합니다. 또 한 문둥병자가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라고 고백한 것처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실 때도 “믿기만 하라”(막5:36)라고 말씀하셨고, 혈루증 걸린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5: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구원받기 원하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바디매오는 믿음대로 즉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좇았습니다(막10:52).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디매오 사건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행하신 마지막 이적으로서, 공생애 사역의 총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공생애에서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을 상기해 보면서 주님이 원하는 믿음의 관계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아 겨냥했고, 자신이 예수님 앞에 얼마나 불쌍한 자인지를 고백했습니다. 또 겉옷을 내어 버리는 확실한 믿음을 표현하면서 예수님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나아갔기에 그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나를 알고, 확실한 믿음을 고백할 때 예수님을 바로 보고 믿고 좇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온전히 믿고 좇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과 나 사이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도 바디매오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육의 눈은 볼 수 있지만,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어둠 속을 헤맬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전도자를 보내어 복음을 듣게 하시고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도, 예수님을 보고 온전히 섬기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 뜻대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바로 보고 믿음을 고백하며 예수를 좇았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뜬 후 어떤 것을 좇고 있습니까?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살면 영안이 다시 어두워집니다. 예수님이 보게 하신 영적인 눈으로 천국을 소망하고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좇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84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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