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죄 사함의 구원을 베푼 예수

등록날짜 [ 2024-05-21 13:02:55 ]

예수님의 공생애 모든 초점은

십자가 고난을 향하고 있으며

그 십자가는 나의 죄를 해결할

‘대속물’로서 죽으심을 의미해


마가복음 11~15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인 고난주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이 마가복음의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마가는 당시 엄청난 핍박과 시련을 겪던 로마의 그리스도인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를 썼습니다. 이는 로마 권력의 대대적인 박해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수난의 의미를 깨달아 위로와 격려를 얻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고른다면 ‘대속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기간에 병든 자를 고쳐 주셨고,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질책하면서 회개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짜 목적은 회개의 복음,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고 그 죄 사함에 이르려는 ‘대속물’로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결국 예수님의 공생애 모든 초점은 십자가를 향하고 있으며, 그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대속물’로서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11장 1절은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속 사역을 이룰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지시하십니다(막11:2~3). 제자 둘이 맞은편 마을로 가자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 것을 보았고, 주님이 일러 주신 대로 말하자 그 주인이 즉시 순종하여 나귀를 내어 줍니다. 주님은 만물의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그분에게는 피조물이 거역할 수 없는 절대 권위가 있기에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다 이뤄지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나귀를 타십니다. 그런데 나귀에 안장이 없기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걸쳐 안장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누추한 제자들의 겉옷도 주님께 드리니 ‘주의 보좌’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게 있는 것을 주께 드리면 귀한 것이 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자 몇천 명이 배불리 먹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그냥 지니고 있으면 낡고 쇠하고 없어지지만 주께 드리면 하나님을 위한 선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또 드리는 자에게는 드릴 것이 더 풍성해지도록 해 주십니다(고후9:8~10). 그러므로 주께 드리는 일은 이익이요,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귀를 타신 데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오시기 약 520년 전 스가랴 선지자가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예수께서는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나귀를 타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나사렛 출신인 예수님이 거룩하지 않은 죄인들과 다니는 모습을 보며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타고 가면서 자신이 구약의 말씀을 이룰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어 사람들이 제자들을 따라서 길에다 자기들의 겉옷을 깔아 드립니다. 이는 왕이 입성할 때 카펫을 깔아 예우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솔선해 자신의 겉옷을 주님의 안장으로 깔아 드렸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덩달아 주님을 높여 드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칩니다(막11:9). 이 장면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 사람들이 칭송하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삼상18:6~7).


여기에서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구원하시옵소서’라는 의미이고(시118:25), 고난에 처한 백성이 왕이나 신에게 도움을 청할 때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말은 시편 118편 26절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아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즉 “시편의 ‘우리를 구원할 자가 주의 이름으로 온다’라는 말씀이 바로 예수라는 당신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또 사람들이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막11:10). 다윗왕이 국경에 방치된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긴 후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을 축복하며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삼하7:8~16). 이 언약대로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당신은 다윗에게 약속했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그리스도가 맞습니다. 드디어 우리를 구원하시는군요”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사람들이 바란 구원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키고 번영했던 다윗의 나라를 다시 일으키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자 그들은 돌변하여 예수님을 배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저주하고 맙니다(마27:22~23).


세상에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많습니다. 독재자로부터 해방받는 정치적 구원, 빈곤에서 벗어나는 경제적 구원, 질병에서 놓임받는 육체적 구원도 있습니다. 정치, 빈곤, 병에서 구원받더라도 그런 구원은 한시적인 행복만 제공할 뿐입니다. 장차 하나님이 시행하실 영원한 형벌과 영생의 심판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습니다. 그런 구원은 한 차원 낮은 구원입니다. 성도 중에도 낮은 수준의 구원만 간구하는 사람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주님은 가장 높은 구원의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구원, 이 땅의 다른 종교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을 베푸는 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주시는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만 높이기를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강해(30)

위 글은 교회신문 <850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