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나누며] 내 삶의 ‘고도’를 만나다

등록날짜 [ 2010-03-29 13:29:13 ]

인생의 뚜렷한 ‘목표’가 있음에 감사

대학 2학년 때 존재감에 대한 고민으로 청년의 시기를 방황했던 것이 기억난다.

대학로에서 친구들과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한 적이 있다. 텅 빈 무대 위에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있고, 두 명의 떠돌이 남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고도’라는 인물을 온종일 기다리다 결국 그 전날도 그랬듯이 ‘고도’가 다음 날 온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똑같이 ‘고도’만을 기다리는 이야기로 허무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즉 그들에게 ‘고도’는 처음부터 만날 수 없고(물론 배역도 없다), 그래서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단지 기다림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연극을 관람한 후 나는‘나에게 있어 ‘고도’는 무엇이고, 누구인가?’라는 나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회의로 수개월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야만 했다.

“그저 이 땅에 태어났으니 성장하고 공부하고, 잠자고, 먹고, 일하고, 웃고, 울고... 그러다가 죽음으로 삶을 마감한다. 어쩌면 살아있으니 사는 거고, 살아갈 거면 나의 자유의지대로 살다가 마감하면 되는 거지. 인간의 삶은 고귀한 것으로 위장한 망나니라니.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를 싣고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무기력하고 푯대 없는 삶이여!”
심각한 방황의 터널에서 그 당시 나의 존재를 다시 그나마 일으켜 세운 건 부모, 형제, 친구, 선생님 등 내가 아는 지인들에 대해 내 삶의 충실로 보답하는 것이었다. 물론 주님을 몰랐던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났다. 나의 ‘고도’는 결국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내일로 또 내일로 만남을 미루기만 하는 무기력한 ‘고도’가 아닌, 이미 내 옆에서 내 손을 잡고 같이 호흡하시는 주님이시다. 이제 그분을 만났기에 오늘 밤을 외롭고도 두렵게 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사면이 꽉 막혀 포기하고 절망했었지만, 그분은 항상 열어주셨다. 의사로서는 못 고치는 병이었지만 그분께서는 흔적도 없이 고치셨다.

예수는 내가 살아가는 삶의 희망이요, 기쁨이다. 내 삶의 푯대는 주님의 품이다. 내가 사는 이유는 주님 보시기에 기쁘고 충실한 삶으로 보답해 드리는 것이다. 삶을 마감하면 그만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천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감의 해답은 주님 안에 있었다. 청년의 시절, 무의미하게 버려진 시간이 너무 아깝고 주님께 죄송스럽지만 허락하신 남은 시간만은 값지게 올려 드리리라.

위 글은 교회신문 <18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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