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나누며] 사랑으로 만든 김치

등록날짜 [ 2010-12-08 10:22:34 ]

어릴 적 이맘때가 되면 오빠와 나는 바닷가로 내려가 해수를 퍼다 날라야 했다. 200포기나 되는 배추를 다 절이려면 커다란 고무 대야를 가득 채워야 하니 손이 시리고 어깨가 욱신거려도 어쩔 수 없었다.

배추를 절이고 다시 배추를 건져내 씻고 물기가 빠질 동안, 할머니와 어머니는 손발을 척척 맞춰 야채를 썰고, 양념을 버무리고, 물기가 적당히 빠진 배추들 속에 양념을 골고루 발라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으셨다. 분주한 할머니와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간이 맞나 확인하는 것은 우리 삼남매 몫이었는데 그때마다 맵다고 손사래를 치면 어머니는 미리 만들어둔 손두부를 큼직하게 썰어 입에 넣어주셨다. 아버지가 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뒷밭에 파묻는 것으로 우리 집 김장은 끝이 났다.

벌써 20년 전 얘기다. 중학교부터 섬에서 뭍으로 유학하다 보니 고향 집 김장철 풍경에는 삼남매가 하나 둘 빠지고, 배추 포기도 점점 줄어들고,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는 아련한 추억이 됐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김치는 아예 마트나 슈퍼에서 사다 먹어야 했다. 그러나 8년 전 우리 교회에 온 뒤로 김치 때문에 돈 들인 적이 없다. 동생과 단둘이 자취한다는 것을 알고 교회 친구들이나 언니들이 늘 김치를 챙겨 준다. 젊은 아가씨들이 몇 겹이나 싸도 냄새가 솔솔 풍기는 김치통을 들고 지하철에 올라타 승객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감수하면서도 내가 맛있게 먹을 걸 생각하고는 체면과 부끄러움도 떨쳐버렸을 것이다. 그런 김치를 받아들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머니 있는 친구들이 부럽다가도 내 어머니 못지않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 있어 행복하다.

사흘 전에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과일 몇 개로 간단히 저녁을 떼울까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교회 친구가 김장을 했는데 좀 챙겨다 주겠다는 전화였다. 이십 분쯤 뒤에 커다란 종이 가방에 김치며 고구마, 홍시를 잔뜩 담아왔다. 종이 가방을 건네 들자 묵직한 무게가 그리운 어머니의 마음으로 다가온다. 친구가 건넨 갓 담근 김치를 보니 입맛이 돌아 밥통을 열었다. 찬 기운이 훅 끼쳤다. 당장에 슈퍼로 달려가 즉석밥을 사서 김치를 쭉 찢어 얹어 먹으니 맛도 맛이지만 내 마음이 더 따뜻해지는 것은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와 그 어머니의 마음이리라.

이제까지 염치없이 얻어먹기만 했으니 내년에는 나도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 한번 만들어 볼 작정이다. 그런데 어머니들이 주신 김치만큼 맛있을지 자신이 없다. 온갖 재주를 부리고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고 해도 내게는 부족한 가장 중요한 양념이 그들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 나누는 따뜻한 정, 베풀고 싶은 마음, 함께 나누는 기쁨으로 만든 사랑의 양념 말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2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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