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사부곡(思父曲)

등록날짜 [ 2013-02-26 09:34:54 ]

보름만인가 보다. 차창으로 보이는 이제는 낯익은 가로수들, 상가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 풍경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도착지에 다다랐다. 퀴퀴하고 비릿한 냄새, 생사의 중간 즈음 자리한 듯 딱 그만큼의 조명과 생기 없이 마주치는 얼굴들.

맨 안쪽에 그의 침상이 있다. 오른팔에 길게 깁스를 하고 가슴은 흉배 같은 것으로 침대에 묶여 있다. 움푹 꺼진 두 눈은 흐리고, 틀니 없는 입은 허무하기 그지없는 심연 같다. 무엇이 그리 반가울까. 내 손을 덥석 잡고 눈으로 말을 하는 나의 아버지. 노여움과 명령조의 애원인 것을 잡힌 손이 느낀다.

내 신분을 확인한 간호사들이 얘기를 쏟아놓는다. 팔이 부러진 과정, 오른손을 다쳐 밥을 먹여야 하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얘기, 수면제를 먹고도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등 모두 불만뿐이다. 간호사들의 불만을 귓등으로 넘기다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도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

두어 달 전 이곳으로 옮겨와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인 반백이 된 머리는 제대로 씻기지 않았는지 허연 비듬이 일고, 입 언저리의 먹고 난 흔적과 내 손을 쥔 기다란 손끝, 매의 발톱처럼 굽어진 때 낀 손톱. 손톱깎이를 달라고 하여 날을 들이밀자 오래 퇴적된 돌처럼 손톱이 부서진다.

내게 아버지의 기억은 서늘함이다. 편안함이나 온기라곤 없었다. 스무 살이 되면 나는 가난도 한도 폭력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 무인도를 사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스무 살에도 난 여전히 가족이라는 이름 속에 머물러 있었다.

빵을 달라는 소리에 틀니를 서툴게 끼워 주고, 사 가지고 간 빵 하나를 쥐어 준다. 설탕가루가 떨어질까 휴지를 뽑아 턱 밑에 받쳐 두고 침상을 좀 세운다. 빵을 제대로 잘라내지 못한다. 뭔가 문제가 있다. 위 틀니가 들썩인다. 한참을 씨름하듯 반 정도 빵을 먹고 물을 빨아올린다. 문득 이런 것이 사는 걸까? 이렇게라도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구원받을 시간을 주신 것이라 믿고 남은 시간 부지런히 복음을 심어야 할 테지.

그런데 거대한 무력감이 가로막는다. 저주스러울 만큼 끊고 싶던 혈연이건만, 당신이 내 아버지임을 한사코 부정하던 사춘기와 그 이후로 긴 세월을 지내고도 난 반송장인 아버지 앞에서 육정이 앞서고 편안하게 천국 갈 보혈의 티켓을 쥐여 주지 못한다.

귀가 어두운 아버지는 설교 테이프도 안 듣는다. 유일하게 반기는 신문도 교회신문은 수박 겉핥기다. 꾀를 내어 치사한 방법도 써 본다. 빵을 좋아하는 아버지 앞에 빵을 보란 듯이 놓고는 교구에서 노인들이 신앙고백 하도록 준비한 ‘예수 내 구주’라고 큰 글자로 쓰인 고백서를 소리 내어 읽으면 주겠노라 해보지만 소득도 없다. 구겨진 얼굴에서 험한 말만 되돌아온다. 늘 이런 식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 가던 병문안을 보름 정도 쉰 까닭도 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없다고 미욱한 제자들을 나무라시던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약속으로 다잡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주님 앞에 내려놓는다.


/정성남 집사
(연합 여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32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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