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2-18 11:32:33 ]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아빠” 하면서 아이가 달려온다. 아이 목을 끌어안고 이곳저곳 입 맞추고, 번쩍 들어 올려 큰 원을 그려 준다. 그러면 아이는 크게 소리 내 웃는다. 세상 어떤 음식보다 맛있고, 그 어떤 스포츠 경기보다 재미 있다. 하루 스트레스가 다 사라질 만큼 에너지가 샘솟는다. ‘주님,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한번은 퇴근 후 품 안에 달려들 아이를 잔뜩 기대하며 입술을 훔치고, 스트레칭도 하며 집 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아이는 할머니 핸드폰에 시선을 두고 있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선 아빠가 핸드폰 속 애니메이션 앞에서 작아진다. 팔을 벌리고 아이 이름을 크게 불러도 소용없다.
우선 ‘핸드폰 고장’이라는 긴급 처방으로 아이와 핸드폰을 떨어뜨려 놓았지만, 뭔가 기분이 찜찜하다. 애니메이션에 밀려나서 샘이 나서도 그렇지만, 아이에게 채워 주지 못한 무엇이 있지는 않은지, 또 아이를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면 더욱 그러하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동영상 속 어떤 캐릭터보다 아빠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가르치면 된다.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기보다는 적응력을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강하고 경쟁력 있는 아이로 자라면 좋지 않은가.’ 멋진 생각이고 멋진 말이다.
그런데 정작 세상을 바라보면 무섭고, 나 자신을 바라보면 부끄럽다.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는 자극적인 기사들이 넘쳐난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무서운 일들을 자연스레 전파를 타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본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모임과 예배에 방해되니 아예 핸드폰을 새 모이 주듯 던져 준다. 아이들은 핸드폰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든다. 엄마들은 아이와 남편이 잠든 시간에 SNS(소셜네트워크)를 하며 스마트폰 속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조용히 펼친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텔레비전을 의기양양하게 껐으나 마귀는 엄청난 마케팅의 힘으로 우리 손에 핸드폰을 쥐어 준다. ‘살아가려면 꼭 필요할 거야’ ‘정말 멋진 물건 아니니? 너희 반에서 너만 없잖아’라고 아이들에게도 속삭인다.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스마트폰에 빠지지 말라고 설교 말씀을 들었어도 그때뿐. 정작 생활에서는 무기력하다 못해 핸드폰과 미디어에 시선을 모두 빼앗긴다.
목사님께서 설교 말씀 중에 “거기 영생이 있어요? 생명이 있어요? 구원이 있어요? 죄 사함이 있어요?”라고 하신다. 허튼 웃음 대신, 기도 중에 통곡이 나오는 이유는 세상과 짝지을 때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거부할 힘이 없는, 절제할 힘이 없는 내 모습 때문이다.
사실 자녀 교육 얘기하려고 했는데 너무 옆길로 샜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버지가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의 가장으로 본이 된다면 이게 바로 자녀 교육 아닌가?
/김기환 집사
남전도회 새신자실
위 글은 교회신문 <37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