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크리스천의 눈

등록날짜 [ 2013-09-17 09:16:02 ]

요즘 작은 글씨가 잘 안 보인다. 흔히 말하는 노안이 왔다. 책을 읽을 때 눈이 피로하고, 책에서 눈을 떼고 먼 곳을 바라보면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인다. 물체에 초점을 맞출 때, 수정체가 얇아지거나 두꺼워지는 기능이 떨어진 탓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유는 빛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 빛을 제일 먼저 만드셨을까. 하지만 첫째 날 만드신 빛은 태양 빛이 아니므로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빛이 아닐 수 있다.

다이앤 애커먼이 쓴 『감각의 박물학』에서 소개한 ‘시각’의 첫 부분에서는 사람의 눈을 ‘포식자의 눈’이라고 소개한다.
“포식자 대부분은 두 눈이 머리 정면에 똑바로 붙어 있어 양안시(兩眼視)를 이용하여 사냥감을 발견하고 추적한다. 인간의 눈은 두 곳에서 따로 빛을 모으고, 중요하거나 색다른 이미지를 건져 올리고, 정밀하게 초점을 맞추고, 공간 속에서 위치를 파악하고, 대상을 뒤쫓는다. 눈은 최상의 입체적 쌍안경이다.”

책에서는 총천연색을 볼 수 있는 사람과 달리, 많은 동물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소개한다. “색깔을 즐기고, 구분하고, 눈을 이용하여 삶을 의미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방법은 인간만이 사용할 줄 안다.” 진화론을 바탕으로 서술한 과학책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할 때, 나는 창조주를 떠올린다.

눈은 보는 기능뿐만 아니라 감정을 전달할 때도 사용한다. 대니얼 맥닐이 쓴 『얼굴(The face)』에서는 눈을 ‘한 쌍의 별’이라고 소개한다.

“눈은 얼굴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친밀한 부분이다. 화가 나면 마치 생각만으로 대상을 불태워버리겠다는 듯이 뜨겁게 타오른다. 기쁠 때나 사랑을 느낄 때면, 눈은 별처럼 반짝이며 사람들에게 안을 들여다보라고 손짓한다. 눈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 같다.”

눈이 얼마나 많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심리학자 사이먼 배런코언은 흥미와 무관심 외에 메시지 스펙트럼이 열다섯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혼란과 고요, 다정함과 냉담함, 확신과 회의, 사려 깊음과 생각 없음, 진지함과 경박함, 슬픔과 기쁨, 주목과 무심, 지배와 복종, 호의와 적의, 좋아함과 싫어함, 신뢰와 불신, 경계와 방심, 거짓과 진실, 놀람과 앎, 분노와 용서가 그것이다.

언어가 다르면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눈은 온 세상에서 통용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 라 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떤 눈을 지녀야 할까?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어야 한다. 천국을 소망한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 윤석전 담임목사님은 사람이 성취할 제일 큰 목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말씀대로 살려면, 기도생활은 기본이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신앙생활은 필수 사항이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이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만 보면 소망이 없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자. 노안으로 눈은 어두워지지만, 영적인 눈은 항상 밝게 뜨고 예수만 바라보며 오늘을 살았으면 한다.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5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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