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3-04 14:28:31 ]
취업을 앞두고 자동차 회사에 면접을 볼 즈음, 제 눈엔 온통 그 회사 대리점과 차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많은 줄 몰랐으나 관심사 안에 들어오니 어디를 가나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결혼 후 임신했을 때엔 임신부가 어쩌면 그렇게도 눈에 많이 들어오던지, 온 세상에 마치 임신부만 존재한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임신부만의 소소한 애환들을 직접 겪으며 임신부를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더 심해졌습니다. 어딜 가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와서, 매스컴에서 출산율이 저조하다고 보도할 때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이렇게 사람은 자기가 크게 관심 두는 것들을 더 두드러지게 바라보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다리를 다쳐서 불편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이 무수히 눈에 띕니다. 세상에 다리만 불편한 사람도 이렇게 많구나 싶어 새삼 놀랐습니다.
목발을 짚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경험했습니다. 우선 육체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불편한 다리 대신 양팔로 목발을 짚으니 안 쓰던 손과 팔 근육에 무리가 가서 무척 아팠습니다. 그나마 근육이 적응하여 금방 나아졌습니다. 최대한 움직이는 일을 줄이고, 누군가 자동차로 이동하게 도와줄 때는 크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혼자 외출할 때입니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보행이 불편한 사람에게 계단은 마치 다윗 앞에 골리앗과도 같은 장애물입니다.
다리가 불편하지 않을 때는 도로에 속속 늘어나는 저상버스(버스 출입구부터 차내까지 계단이 없는 버스)를 보며 ‘저게 왜 필요한 걸까? 저걸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실제로 했었습니다. 저상버스를 제작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일반 버스보다 훨씬 길이가 길어서 운전하는 기사분도 새로 적응하려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다리가 불편한 상태에서 저상버스를 이용해 보니 그 필요성을 실감했습니다. 버스를 오르는 계단 세 칸을 낮춘 일이 다리가 불편한 이에게는 얼마나 큰 배려인가를요.
추운 겨울에 버스를 기다리다가 일반 버스가 오면 그냥 보내고 다시 저상버스를 기다렸습니다. 막상 저상버스가 와도 걸음이 느려서 맨 나중에 탑니다. 불편한 다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때서야 왜 노약자 보호석을 비워 둬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한된 시간에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더욱 긴장이 됩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앞을 보지 않고 마구 걷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네들을 피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자칫 세게 부딪히면 보행이 불편한 사람이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몸이 불편하지 않을 때는 모두 남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천국’이 남의 이야기였던 것처럼요. 그러나 진정 주님을 만난 후부터는 말할 수 없이 절실하고 내 전부가 됩니다. 모르는 이는 애꿎은 시선을 던지기도 하지만, 알고 나면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김영희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7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