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6-17 09:15:25 ]
지난 4월 세월호 사고 직후에 발생한 일입니다. 한 방송사의 뉴스를 시청하다가 한동안 세간의 화제가 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뉴스 앵커는 한 해양 전문가를 전화로 연결해 인터뷰를 했습니다. 앵커는 “실종자들의 생존과 구조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해양 전문가는 선박의 설계구조를 근거로 들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결론을 ‘단호하게’ 내렸습니다. 답변을 들은 앵커는 얼굴을 붉히며 수 초간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방송 사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앵커는 실종자들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침통함에,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많이 격앙된 것 같았습니다.
앵커의 반응을 보면서, 순간 제 마음을 콕 찌르는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백 명이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말을 하면서도 단호함을 잃지 않는 전문가, 그리고 그 단호한 기술적 분석을 들으면서 생방송 중 방송 사고를 낼 만큼 마음의 아픔을 느끼는 앵커. 나는 이 둘 중 누구의 마음가짐으로 사건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의 처지에 있었다면, 생존과 구조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진단을 그렇게 냉철하고 단호한 태도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전문가의 단정적인 대답을 들으면서도, 앵커의 반응을 보기 전까지 하등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그 전문가의 무딘 마음으로 사건을 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소 어려움에 처한 분들을 나름 배려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다른 이가 겪는 고통에 진정 어린 공감조차 하지 못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그렇게 제 허물을 자각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저처럼 마음 무딘 사람들이 연출하는 해프닝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한 기상 캐스터는 내일 사고 해역의 날씨가 좋을 예정이니 구조 활동이 원활하리라는 소식을 ‘방긋 웃으며’ 전했고, 학생 빈소에 조문을 간 어떤 장관의 수행원은 장관보다 몇 발 앞서 들어가 유족에게 “장관님 오십니다”라는 말을 전했다가 유족에게 “뭘 더 어쩌라는 것이냐”라는 항의를 받았습니다. 어떤 뉴스 진행자는 구조된 학생을 인터뷰하면서 친구의 사망 사실을 아느냐고 물어, 심신이 지쳐 있을 학생의 마음에 불필요한 상처를 내기도 했습니다. 모두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해서 빚어진 ‘실수 아닌 실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더 적극적으로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려면 고통 중에 있는 마음에 공감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물론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타인이 서 있는 바로 그 위치에서 마음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제 주변으로 눈을 돌려봅니다. 제가 속한 남전도회원들이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 자녀의 질병, 갖가지 문제로 겪는 가정 내 고통, 이 모든 내용을 전하는 문자나 카톡 메시지에 나는 얼마나 공감했는지. 또 질병에 고통받는 성도를 위한 기도에 나는 얼마나 애절한 마음으로 임했는지. 주님 말씀 따라 사노라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무딘 마음으로 사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면 공감하게 되지만, 반대로 사랑은 공감하는 데서 시작하기도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라도, 공감하는 심정을 달라는 기도에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이계룡 성도
35남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38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