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선의(善意)’로 한 행동과 말의 역설

등록날짜 [ 2014-12-15 19:38:23 ]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면 오히려 큰 상처가 될 수도

내 잘못은 아닌지 늘 생각하고 고치는 습관 필요해

 

다른 성도님들도 그러시겠지만, 저도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여러모로 노력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선의로 행한 말과 행동이 본의 아니게 상대를 불쾌하게 해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지하철을 타고 가다 자리가 생겨 앉았습니다. 다음 역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 신사 한 분이 제 앞에 섰습니다. 서 계신 모습이 그리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연장자를 배려하고 싶어 주저하지 않고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왜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느냐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그냥 앉아 있으라고 거절했습니다. 처음에는 자리를 양보받는 어른들이 하는 의례적인 표현인 줄만 알고 “괜찮다”면서 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결국, 신사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리에 앉더니,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받아 보기는 처음이네. 내가 벌써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제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연장자를 섬기겠다는 선의로 자리를 양보했는데, 그분께는 그것이 자리를 양보받아야 할 만큼 나이 들어 보인다는 독설이 된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는 이런 일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장애인 단체가 ‘OOO 장애인 애호 협회’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장애인들에게 항의를 받아 급하게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애호’라는 단어가 참 좋은 말이기는 한데, 장애인을 다른 사람의 전적인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모자란’ 대상으로 깎아내린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변호사애호협회’라든지, ‘의사애호협회’ 혹은 ‘대통령애호협회’라는 단체명이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애호’라는 말이 어떤 결핍이 있다고 여겨지는 집단 앞에만 붙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배려는 그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은연중에 상대방이 내 선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비자립적인 존재라고 전제하게 되므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겸손이나 감사를 표할 때도 비슷한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낮추려고 하는 말이 타인을 폄하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A라는 정도의 직업밖에 못 가질 사람인데, 과분한 은혜를 받아 지금은 더 귀한 직업을 갖고 있다”는 식의 말이 그렇습니다.

 

자신을 낮추려다가 A라는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 전체를 깎아내리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고통에 힘겨워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그런 고통에 시달리지 않아서 큰 복 받아 감사하다”는 식의 말은 상대에 대한 정죄가 될 수 있습니다. 질병을 앓는 당사자가 복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의가 불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특정 상황에서는 선의가 상대를 깎아내릴 수 있으므로 의도치 않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혈기나 분노처럼 눈에 보이는 불의는 절제하기 어렵지만 눈에 선연히 보이므로 오히려 죄로 쉽게 인식합니다.

 

하지만 선의가 악으로 작용한다면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아 자각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실수도 더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이계룡 성도

(36남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41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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