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미웠다, 하지만 그땐 그랬다

등록날짜 [ 2014-12-30 14:59:47 ]

# 스무 살 어느 겨울의 끝자락. 아버지의 트럭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어디론가 갈 일이 생겼다. ‘목소리가 거칠어진 변성기 이후 아버지와 단둘이서 뭔가를 해 본 기억이 있었나?’ 그 어색함을 벗어나려 창문을 조금 내리니 봄 향기가 와 닿았다. 코끝이 싸늘했다. 빨리 봄이 오면 좋겠다는 조바심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창문을 다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감기 든데이. 문 올리라.”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이른 봄날의 향기 맡기는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와 둘이서 추억을 만든다는 기대? 안타깝지만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쓴 일기는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밉다. 엄마가 불쌍하다. 공부 열심히 하자. 부산을 뜨자. 그게 살길이다.’

 

나에게 아버지는 가정보다는 일로 바쁘고, 너무도 무뚝뚝하고, 이유 없이 피하고 싶은 그런 존재였다. 아버지가 미웠다. 그땐 그랬다.

 

# 대학 진학으로 부산을 떠난 해방감과 기쁨도 잠시. 당시 ‘우리 집안사람들은 교회에 다닐 수 없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문율이었다. 착실하던 형이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아버지요, 저 교회 나가고 있습니더”라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형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없이 그길로 집을 나가셔서 술을 거하게 드셨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형을 때리느라, 형은 아버지에게 맞느라 결국 두 사람 다 기절했다. 말릴 수도 없었다. “내 아들 죽는다”며 울부짖는 어머니의 소리밖에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예수쟁이, 니는 인제 내 아들이 아니데이”란 한마디 말로 형과 끝을 보셨다. 우리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때 나에게 형은 집안을 엉망으로 만든 문제아였고, 학업도 미래도 포기한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형이 싫었다. 그땐 그랬다.

 

# 그 후, 아버지와 소통하게 된 계기는 대화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생존의 시대를 모질게도 버텨 낸 그분의 세월을 나 자신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버지의 외로운 뒷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 시절 흰돌산수양관 성회에서 윤석전 목사님께 들은 “모진 세월 속에 너희를 길러낸 아버지, 어머니가 불쌍하지도 않느냐”라는 절규의 외침에 한없이 울며 기도하고 나서야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다.

 

형과 소통하게 된 계기는 형을 만나러 교회나 기도원의 입구에 가 봐서가 아니다. 당시 내 불신앙의 소견으로 교회에서 먹고 자며 교회 청소와 식당일이나 하고, 기도원 차량을 운전하는 형의 모습에서 오히려 반발심만 생겼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을 체험하고 나서야 주 안에서 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형의 삶과 그 환한 미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라는 말씀은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천국에 가신 아버지도, 목사가 되어 열심히 주의 일에 충성하는 형도, 그리고 연세중앙교회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어머니와 나도 그 말씀의 이유이자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랴! 하나님 말씀 안에는 미워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진실한 소통의 기쁨만이 가득할 뿐이다.

/ 김기환 집사

(27남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41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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